치에가 시음을 끝내도록 한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치에가 한주를 보며 이상하다는 투로 물었다.

“술들이 어땠는지 안 궁금한가 봐? 여기 사장님 하곤 안 친해?”

“아니 안 친한 건 아니고. 말했지만 여긴 한의사 선생님이 사장님이라 내가 대신 관리를 맡고 있지. 이렇게 손님이 오시면 응대도 하고. 말하자면 그 정도로 친한 거야. 그래 술들은 어땠어?”

“음, 처음 이 술은 굉장히 재미있네. 일본의 니고리자케 중에서도 딱 이런 스타일의 술이 있어. 보통은 달지만 이렇게 사정없이 드라이한 그런 스타일. 마니아들이 있는 술이지.”

“그건 호모루덴스라는 술이야.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이름이 재미있네. 바로 그런 점이 일본의 니고리자케와는 달라서, 어쩌면 젊은 층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치에는 간밤의 숙취도 없는지, 혹은 업자란 본래 그런 것인지, 술을 분석하고 타겟층을 상상해보고 일본술과 비교해보고 이런 과정에 한 점의 알코올이기가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마신 술은 어때?”

한주가 동정춘을 가리키며 물었다.  

“동정춘. 달고 맛난 술이네. 진하고 묵직하기까지 하고. 이것도 음주용으로는 썩 좋은 술은 아니지만 페어링만 잘 하면 분명 반응이 있을 술이야. 이 정도 당도면 메인과 어울려서는 힘들고, 치즈나 과일, 디저트 같은 쪽으로 페어링이 정석일 것 같네.”

“응, 그 동정춘은 원래 이화주만큼이나 뻑뻑하고 진한 술이야. 디저트 페어링이라기보다는 자체로 디저트로 내도 될 만큼. 이건 음주용 버젼이랄까, 클래식 버젼보단 수분이 좀 많은 편이지.”

“음, 단 것도 어렵지만 이거 석탄주랑도 비슷하네. 한국엔 이런 스타일의 술이 너무 많아서, 그게 어려운 점이겠네. 딱 이 술을 써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 그런 게.”

“응 시장에 단 술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면 문제기는 하지. 술들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긴 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지.”

한주도 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기가 돌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자, 마지막 이 술.”

치에가 마지막 잔을 눈높이로 들고 다시 술을 쳐다보고 한 모금 마셨다.

“이 술 정말 재미있네. 잣이 들어간 모양이지? 그것도 제법 많이. 잣이라는 포인트가 좋은 것 같아. 이 잣으로 인해서 평범하고 달착한 탁주가 새로운 개성이 생겼어. 잣향도 좋고, 이 은근한 잣기름 냄새가 엄청 부드럽기도 하고, 텍스쳐도 범상치 않게 만들어주네. 그나저나 평범하다느니 범상치 않다느니 하는 말을 쓰는 걸 보니 나도 이제 한주에 제법 익숙해졌구나.”

“응,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우리나라 최대 잣 생산지중 하나가 홍천과 그에 인접한 가평 지역이야. 그 특산물을 이용해서 빚는 술. 이거야말로 한주의 정신에도 부합하고 무엇보다 결과물의 수준이 높지.”

“응. 이 양조장의 플래그십은 이 백자주가 아닐까 해. 게다가 한의사 선생님이 빚는, 건강에 좋은 술이라는 이미지도 괜찮을 것 같고.”

“그런 억지 이미지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술이야. 본인도 약이라는 개념으로 술을 빚는 건 아니라고 하시고."

"하긴 그래. 건강에 좋다 이런 마케팅으로 술을 파는 건 좀 이상하긴 하지. 술이 건강에 꼭 안 좋은 것도 아니긴 하지만 몸에 좋다는 것 말고도 여러가지 가치가 있는 문화상품인데."

"세 번째 술이 특히 재미있네. 백자주... 잣이 들어간 술인 거야?"

"응 그렇지. 홍천의 특산물 중 하나가 잣이야. 사람들은 이웃의 가평 잣만 알지만... "

"이 술은 정말 특이해. 잣의 향뿐만 아니라 아마도 잣기름이겠지? 뭔가 그런 지방질이 느껴지는데, 술을 부드럽게도 해주고 반면 보디감에는 더 보탬이 되는 것도 같고... 아아 이런 술은 처음인걸?"

그럴 것이다. 잣의 지방질이 느껴지는 것이 이 술의 특징이고 달리 예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 지방질이란 것이 산화도 빠르고 해서 다루기가 참 어려운 성분인데, 멋진 술이 나왔지?"

"응. 단 술이라 산미가 있는 것이 좋은데 또 그 산미가 잣향으로 부드러워지는 느낌도 있고, 정말 매력적이야."

한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역시 갑작스럽게 말한다.

"자, 이제 돌아가야지. 서울에 약속도 있고, 내일은 일본으로 돌아간다며? 이제 터미널로 데려다 줄께.”

차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는데도 공연하다 싶게 서두르며 한주가 또 냉정을 떨었다. 치에도 차에 올라타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깨어난 듯이 발랄한 목소리로 거의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한주 씨, 월드 니혼슈에 한주 사업부를 만들어볼까 해.”

“….”

한주는 오히려 뭐라 말이 없다. 분명 뛸 듯이 기뻐해야 할 일인데 말이다.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어. 어제도 말했지만 교육받은 프로페셔널이 없이 판매는 할 수 없어. 그것만 문제도 아니지만, 어쨌든 나부터 교육을 시켜서 한몫을 하게 만들어놓으라고. 수강료도 낼 테니까.”

“…., 그래 한주 대해서 아는 것은 다 가르쳐주도록 할께. 앞으로 한국에 올 때마다 홍천에 들르도록 해.”

“물론이지 한주 사마.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이 술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겪어보고 싶어졌어요. 한주는 생주라서 어렵지만, 생주니까 세상 많은 사람들이 마셔봐야 한다고 생각해. 이건 메시지가 있는 술이라서, 어렵더라도 꼭 해보고 싶어. 당장은 투자가 더 크겠지만 앞으로는 돈도 잘 벌 수 있을 것 같고.”

이런 반응을 보니 한주도 가슴이 뜨거워져서 질투나 혼돈 같은 불편한 감정이 그 열기에 날아가는 느낌이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뒷문을 열고 짐을 내려주었다.

“자, 여긴 차를 오래 세울 수 없으니 여기서 작별이야.”

치에가 한주와 눈을 맞추었다. 하얀 피부에 맑은 눈빛, 소녀같이 나이브한 것도 같지만 한주로선 그 눈에 담긴 감정을 읽을 눈치는 없다. 한주는 뭔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치에의 눈빛에 끌려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면서  조금은 당황하고 있는데, 치에가 갑자기 머리 하나 이상 큰 한주의 목덜미를 안고 까치발을 하고 볼에 입을 맞춘다. 볼의 입술도 그렇지만 가슴께 뭉클한 감촉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건 또 뭔가?’

한주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이벤트에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감당이 안 되게 몰아닥쳐서 또다시 구토가 올 것만 같다.

“한주 사마 곧 또 한국에 올께. 그동안 건강히 잘 지내야 해.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한주가 당황과 구토를 몸과 마음 안에 가두어 두려고 애쓰는 동안 치에는 미소를 뿌려두고 사뿐사뿐 걸어서 터미널로 들어갔다. 한주의 마음은 아직 소용돌이가 치지만 차츰 차분함을 되찾으며 이내 다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었다.

‘몰라. 어쨌든 한주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한 파트너가 된 거군. 일단 그게 중요한 거지. 아니, 파트너면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야 하나… 아 정말 복잡하네. 도대체 나한테,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돌아오는 길은 4차선으로 쭉 뚫린 44번 국도. 한주는 곁 길은 신경 쓰지 말고 이렇게 쭉 가자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진은 산수 양조장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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