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게, 혹은 거의 호통을 치면서 일찍 자라고 했지만, 아니 그래서인지, 이날은 다들 일찍 잠들었다. 

아침해가 밝아오는 것을 보면서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찍이 맞다. 한주가 뭐란다고 고분고분 말 들을 생각이, 특히나 치에는 없었던 모양이라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술자리는 이어졌던 것이다. 하였튼 주량들도 어지간한 셋이서 서로 부어라 마셔라 하고, 물론 처음 들고 온 술은 자정이 되기 전에 일찍이 떨어졌으니 한영이 또 술곳간에 가서 술을 들고 오고. 그러다 보니 안주가 떨어졌다고 냉장고를 뒤져서 계란말이며 채소볶음을 해오고, 정작 일찍 자라고 호통 치던 한주가 다시 또 술을 들고 나오고....

역시 아침에 제일 일찍 일어난 것은 젊은 한영이었다. 숙취가 그렇게 심하지도 않은 듯, 부시시한 기색은 좀 있으나마 털고 나와서 어제 남은 밥으로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해장엔 죽만한 것이 없다.

‘아 그런데 어젠 진짜 뭐였지?’

치에는 계속 한영 옆에 앉아서 손이며 팔이며 어깨를 어루만지고 얼싸안고 난리가 아니었다. 싫은 사람이 그랬으면 성희롱, 아니 성추행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지만 한영은 치에의 그런 손길이, 콧소리 섞인 친밀감이 결코 싫지 않았다. 치에는 막연히 한주와 사귀거나 그럴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의 일을 겪고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싶었다. 일찍 자라는 한주의 호통이 한영과 치에의 그런 광경, 그런 발전을 보며 나온 불편한 반응이란 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도 않았지만, 

‘뭐 어쩔?’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술도 배우고, 세상도 배우고, 한주산업을 개척한다는 큰 뜻을 같이 펴가려는, 스승 같고 친형 같고 동지 같은 존재가 한주지만 그거와 이건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어딘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치에의 마음이다. 그저 술김에 그런 것인지 혹은 진지한 마음인지, 그런 것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는 한영이다.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잘 져으면서 한영의 신경은 오로지 그 한 점에 골똘히 모여갔다.

“어, 일찍 일어났네.”

한주가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오며 정적을 깼다.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거의 다 됐어요.”

대사도 말투도 일상적인 아침 인사가 교환되곤, 그리곤 침묵이 다시 틈을 메우고 들어왔다. 휘젓는 주걱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그 자리를 죽이 메우고 들어오듯이, 끈끈하고 후덥지근해서 불쾌지수가 높은 침묵이다. 남자 둘이 술 마시고 난 다음날 숙취에 빠져 있는데 무슨 대화를 하겠나 생각하면 침묵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이 둘에게 이 침묵은 분명히 이상했다.

한주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뭔가를 생각하려 했지만 생각이 앞으로 나가지 않음을 느꼈다. 생각은 되지 않고 그저 불쾌한 감정의 덩어리, 어딘가가 쓰리고 답답한 느낌이 명치께에서 느껴졌다. 

‘숙취인가?’

하긴 어지간히 마시긴 했다.

‘아니, 보통 숙취는 아닌 것 같아. 이렇게 좋은 술들 마신 다음날 이런 증상은 처음이야.’

홀로 해보는 자문자답이다. 이건 한주가 이제껏 겪어온 숙취의 신체반응에는 없는 일이다.

‘역시, 치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불쾌한 감정의 근원을 직시하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이라는 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영이 저 녀석은 또 무슨 생각이고?’

묵묵히 죽을 끓이고 있는 한영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여러가지 감정 중 단 하나도 사랑스런 동생 같고 자랑스런 제자 같은 한영에 대한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경계심, 당혹감, 의심, 질투심… 그래 질투심. 질투심을 인정하자 생각이 한 발짝 더 나갔다.

‘녀셕, 분명히 즐기고 있더군. 치에도 그렇고 말이지. 도대체 뭘 어쩌자고 이러는 것들이야?’

이때 치에의 가벼운 발걸음이 들리고 그 박자에 맞춰서 아침 인사가 음악같이 울렸다.

“오하요~~”

한영은 뒤를 휙 돌아보고 한주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 그렇게 순간에 두 남자의 눈이 서로 얽혔고, 치에가 만든 잠시의 균열은 다시 메꿔졌다. 이번엔 어딘가 얼음장 같은 데가 있는 차가운 침묵이다.

치에는 그런 침묵에 아랑곳하기엔 아직 정신이 덜 든 것인지, 자연스럽게 한주의 목덜미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 어제는 운전도 많이 하고 술도 많이 마시고 참 힘들었겠다 한주 씨.”

한주는 뭐라고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멍하게 어깨와 목덜미를 맡기고 있고, 그 와중에 한영과 한주의 눈빛은 다시 한 번 엉켰다. 이번엔 이 시선의 엉킴이 소용돌이를 일으켜서 소리도 없이 침묵을 깨 주었다. 제법 열기가 있는 당혹감의 소용돌이가 한주와 한영 사이에 생겨났다. 치에는 홀로 태풍권 밖에서 좋은 아침을 즐기는 모양이고 말이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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