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주무셨어요? 누나. 잠시만 기다리세요 죽이 다 되었어요.”

한영이 말투만으로도 굿모닝이다 싶은 부드러움으로 치에에게 말을 걸었다. 한주와 엉킨 눈길에서 느껴졌던 언짢음, 아니 그 이상의 불쾌함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가증스럽게도, 분명,  천진난만함을 가장하고 있다.

한주는 돌연 구토가 솟아올랐다. 이 복잡한 상황, 복잡한 감정과 어제 마신 술이 범벅이 되어 올라왔다.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치에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달렸다. 급히 달려간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안고 감정과 토사물을 한꺼번에 쏟아내자 비로소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한영이 저 녀석, 아주 남자구만.’

한영의 눈빛이 한주에게 말한 것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수컷의 태도고 치에를 대하는 말투가 뜻하는 것은 암컷을 유혹하는 자세다. 단호하고 효율적이다. 반면 한주의 대응은 어찌나 서투른지 스스로도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치에의 손을 뿌리친 것이야 급해서지만, 결과적으론 난폭한, 그리고도 약한 모습을 보인 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경쟁에 뛰어들 것인가. 아니, 한영이 저놈은 젊어서 저러지 사실 한주는 그렇게 피끓는 청춘은 지났다. 연애감정보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이고 그런 나이다. 치에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가 우선.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젠장,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니 문제가 또 생긴다. 비즈니스가 발전되면 치에와 볼 일이 자주 생기고, 그건 치에와 한영이 볼 일도 자주 생긴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면 치에와 한영이 이렇게 시시덕거리는 것을 계속 봐야 할 텐데, 문제는 이들이 각각 또 다 같이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점이다. 지금 경쟁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앞으로 이런 꼴을 보자면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할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아니 경쟁이라고? 내가 치에에게 무슨 그런 심각한 마음이 있어서 한영이하고 경쟁관계냐고?

이런 복잡한 생각이 드는 순간 다시 한 번 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올라왔다. 이번 한 번을 더 토해내고 나니 머리속이야 아직도 복잡하지만 속에서 더 나올 것은 없이 정리된 느낌이다. 일단 엉망이 돼버린 변기를 씻고,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간다. 

한영과 치에는 이미 식사를 시작했다. 한주가 없는 동안 둘이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거기에 묵묵히 끼어들어가서 한주만 이야기도 웃음도 없이 묵묵히, 대강 아침 식사를, 가장 먼저 마쳤다. 한영은 한주에게 평소와 같은 싹싹함은 커녕 건성으로라도 배려는 전혀 없고, 눈치 백 단 붙임성 백 단인 치에도 한주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다. 하긴 말을 걸어봐야 한주 분위기와 성격에 좋은 반응 안 나올 건 눈치 백 단이 필요 없이 누구라도 알만한 분위기이긴 했다. 그래서 결국은 자못 사무적인 용건으로 옮겨간다.

“오늘도 양조장을 간다고 했지?”
“응, 오늘은 산수 양조장이라는 곳에 갈 거야.”
“또 어떤 곳일지 기대가 되네.”
“가보면 알겠지. 30분 후에 출발할 테니 얼른 준비해.”

한주가 자기 밥 먹은 그릇을 정리하고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찬바람이 휙 부는 속도다. 치에는 눈을 잠시 동그랗게 떴지만 다시 한영과 웃음꽃을 피우며 식사모드. 한주는 그 꼴 보기가 심기가 상해서 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한주가 딱 30분 후에 나오니까 치에도 이미 복장과 짐을 갖춰 한주의 랜드로버 앞에 서있었다.  한주는 말없이 치에의 짐 중 일부를 뒷자리에 실어주고, 나머지는 치에가 스스로 싣는다.

“누나 또 오세요. 연락할께요.”
“그래요 한영 씨, 곧 또 봐요.”

여전히 둘이 화기애애하고 한주만 묵묵히 차를 몰아 바로 출발한다. 다녀온다는 인사도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길을 떠난다.

차를 달려  20분도 안 되는 곳에 산수 양조장이 있다. 산길을 제법 올라가지만 콘크리트 포장도로라 접근하기에 어려울 것은 없다. 이 골짜기를 따라 몇 집이 있는데 거의 끝에 너와지붕이 보이는 집이다. 한주는 내려서 가로대를 밀고 들어간다. 건물의 뒤로 보였던 곳이 오히려 출입문인 재미있는 구조의 집이다.

한주는 냉장고에서 술 세 가지를 꺼내고, 잔도 셋을 꺼냈다.

“여기는 오늘 사장님이 안 계셔. 사장님은 서울에서 개업한 한의사 선생님이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오시지. 평소 투어의 관리 같은 것은 내가 맡고 있어.”

“현직 한의사 선생님의 양조장이라. 뭔가 이 술은 특히 더 건강에 좋을 것 같네?”

“글쎄. 좋은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고 과하면 독이 되고, 그런 건 어디나 같은 거지. 딱히 무슨 약이라는 생각으로 술을 빚는 건 아니라고 본인도 그러셔. 일단 마셔보지 그래.”

한주가 어딘가 평소보다 더 퉁명하게 말을 받고는 석 잔의 술을 따랐다.

치에가 말없이 석 잔의 술을 한 잔 한 잔 음미하며 테이스팅 하기 시작했다. 때는 아침 열 시가 넘어가는 시간, 좁은 골짜기 사이로 해가 비쳐들며 밤 사이에 쌓인 한기가 날아가고 풀잎이며 나무들이 생기를 띄어가는 시점이다. 양조장 마당을 건너서는 좁은 물줄기가 리드미컬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양조장 이름 같이 산수가 아름다움을 뽐내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치에가 경건함에 가까운 태도로 테이스팅을 하는 모습까지, 하나의 종교의식이 펼쳐지는 것만 같은 이 광경에 한주는 눈을 감았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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