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

형가가 연나라 저자에서 술 마실 때
얼큰히 취하면 기세를 더욱 떨쳤지.
애달픈 노래로 고점리(高漸離)의 연주에 맞추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얘기 나눴지.
비록 사나이의 절조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세속의 일반 사람들과는 또 부류가 달랐지.

높다란 곳에서 아득히 조그마한 천하를 살펴보았으니
권문세가쯤이야 말할 필요 있었겠는가!
신분 높은 이들은 스스로 거드름 피우지만
그들을 마치 먼지처럼 가벼이 여겼고
신분 낮은 이는 스스로 천하다고 여기지만
그를 마치 천 균처럼 무겁게 중시했지.

荆軻飲燕市, 酒酣氣益震.
哀歌和漸離, 謂若傍無人.
雖無壯士節, 與世亦殊倫.

高眄邈四海, 豪右何足陳.
貴者雖自貴, 視之若埃塵.
賤者雖自賤, 重之若千鈞.

이것은 진(晉)나라 때 좌사(左思, 자는 太沖)가 쓴 〈역사를 읊다[詠史]〉라는 8수의 연작시 가운데 6번째 작품이다. 좌사는 산둥[山東] 린쯔[臨淄] 사람으로 얼굴도 못생기고 말도 어눌하여 남들과 교유하기를 싫어했지만 글 솜씨는 빼어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태시(泰始) 9년(273)에 그의 여동생 좌분(左棻)이 궁녀로 뽑혀 들어가면서 가족이 낙양(洛陽)으로 이사하고 그도 비서랑(秘書郞)에 임명되어 한때 청운을 꿈꾸기도 했지만, 친한 벗인 가밀(賈謐: ?~300, 자는 長淵)이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그도 벼슬을 버리고 집안에 칩거하며 독서에 빠져 지냈다고 한다.

이후 태안(太安) 2년(303)에는 시골인 기주(冀州,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헝쉐이시[衡水市]에 속함)로 이사해 살다가 몇 년 후 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역사를 읊다〉 연작시를 쓴 것은 대략 낙양으로 들어간 이후부터 진나라가 동오(東吳)를 멸망시킨 태강(太康) 1년(280) 이전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이 연작시의 제1수에 “긴 휘파람 불며 맑은 바람 속에 격정 일으키며, 동오는 안중에 없는 듯 뜻이 높았다.[長嘯激淸風, 志若無東吳]”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해준다.

여기에 소개한 제6수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비장하게 진왕(秦王) 영정(嬴政)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호쾌한 기상을 칭송하고 있다. 시의 처음 4구절은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수록된 형가의 전기 가운데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이어서 시인은 형가가 진왕을 암살하려 한 일이 실패──도잠은 “애석하게도 검술이 허술해서 빼어난 공 세우지 못했다.(〈詠荊軻〉: 惜哉劍術疏, 奇功遂不成.)”라고 설명했는데──한 사실 자체보다 그의 사람됨이 세속의 일반인들과는 달랐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 가운데 시인이 가장 감동한 부분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천하를 내려다보면서 세속의 권문세가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호쾌하고 대범한 영웅의 기개였다. 그런 기개는 술이 얼큰해질수록 “더욱 기세를 떨친다.[氣益震]”고 했으니, 아마도 이것은 두강(杜康)이 술을 만들 때 섞은 세 방울 피 가운데 하나인 무사의 피에 의한 효과가 아닐까? 그러나 비록 ‘방약무인’하게 거침없이 노래하고 떠들었지만 형가와 고점리는 아무 데나 토하고 쓰러져버리는 바보의 피는 걸러서 마신 듯하다.

물론 형가의 기개에 대한 이러한 선망 뒤에는 문벌 정치의 억압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칩거 생활을 해야 했던 좌사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이 숨겨져 있을 터이다. 263년에 촉한(蜀漢)이 멸망하고 삼국정립(三國鼎立)의 형세가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에 진나라 사마씨(司馬氏) 정권은 ‘문선제(門選制)’를 실시하여 가문의 위세에 따라 관료를 선발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미천한 가문 출신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벼슬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동생을 궁녀로 들였음에도 가문의 세력이 미미했던 좌사는 “스스로 황제를 따를 인물이 아니거늘, 무엇 하러 갑자기 여기로 왔던가?(제8수: 自非攀龍客, 何爲忽來遊)”라는 자조적인 후회를 남긴 채, 오랜 칩거 생활 끝에, 정치의 부패가 만연한 낙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러한 절망이 있었기에 그는 시 창작에서 화려한 수사에만 치중하던 기풍이 유행하던 시기에 현실에 대한 시인의 인식과 감정, 인생관을 담은 걸작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시인이 아득한 높이에서 조그마한 세상을 오시(傲視)하는 것은 고대 중국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이어졌으니, 어쩌면 이러한 주제로 중국 고전시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특히 필자는 ‘피휘(避諱)’의 악습으로 인해 청운의 꿈이 좌절되어 비극적으로 요절한 당나라 중엽 이하(李賀: 790~816, 자는 長吉)의 시 〈하늘을 꿈꾸다[夢天]〉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늙은 토끼 초라한 두꺼비 하늘빛 슬퍼하여
구름 누각 반쯤 열리자 기운 벽 창백하다.
옥 바퀴 이슬 속을 굴러 둥근 빛 무리 젖어들고
난패 찬 신선을 계수나무 향기 그윽한 논길에서 만나지.
삼신산 아래 누런 먼지와 맑은 물은
천년의 세월을 말 달리듯 순식간에 바꿔버렸구나.
멀리 중국을 바라보니 아홉 가닥 연기 같고
넘실거리는 바닷물은 잔 속에서 찰랑이는 듯하다.

老兎寒蟾泣天色, 雲樓半開壁斜白.
玉輪軋露濕團光, 鸞佩相逢桂香陌.
黃塵淸水三山下, 更變千年如走馬.
遙望齊州九點煙, 一泓海水杯中瀉.

달과 구름을 내려다보는 높이에서 시작한 시인의 시선은 중국 대륙이 ‘아홉 가닥 연기’처럼 자그맣게 보이고, 거대한 바다도 그저 ‘잔 속에서 찰랑이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 높은 곳에 멈춰 서서 내려오지 않는다. 어쩌면 제목을 문법과는 상관없이 〈꿈에 하늘을 오르다〉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를 이 작품에는 하늘에도 지상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극단적인 소외감과 고독만이 가득 넘친다. 절망과 울분을 품고 시골에서 병들어 죽은 좌사의 비극적 말년을 채웠을 삭막한 마음의 풍경을 5백 년 뒤의 이하가 이어받아 더욱 처절한 노래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 백운재 교수

[칼럼니스트 소개] 백운재(필명)교수는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1999)를 취득했으며 현재 인제대학교 중국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하늘을 나는 수레(2003), 한시에서 배우는 마음경영(2010), 전통시기 중국의 서사론(2004)등의 저서와 두보, 이하 등의 중국 시와 베이징(1997), 서유기(2004), 홍루몽(2012), 유림외사(2009), 양주화방록(2010)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칼럼문의 백운재 peking00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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