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야경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야경

8천년의 양조 역사를 지닌 조지아는 와인의 태생지로 알려져 있다. 1950~60년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천년경 조지아 중부 크라미스 디디 고라(Khramis Didi Gora)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양조장 유적이 발굴되었고 일부 항아리의 내벽에 와인을 담았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또한 2015년 조지아 동부의 신석기 시대 정착지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용 항아리 크베브리(Qvevri)가 발견되었는데, 연대는 기원전 6000년경으로 밝혀져 현재 조지아 국립 박물관에 역사 유물로 전시되어 있다.

조지아 국립 박물관에 전시된 BC 6000년의 크베브리
조지아 국립 박물관에 전시된 BC 6000년의 크베브리

지금도 조지아에서 전통방식의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크베브리는 계란처럼 둥근 토기 항아리로, 진흙을 개어 띠처럼 연결해서 모양을 잡은 다음 불가마에 굽기 때문에 매우 단단한 편이다.

보통 1~2톤 정도의 크기인 크베브리는 원래 ‘땅에 묻은 것’이라는 의미의 ‘크베우리(kveuri)’에서 유래되었으며 한번 땅 속에 묻히면 수백 년 간 그대로 쓸 수 있다. 와인이 발효할 때 나는 열을 땅이 흡수해주기 때문에 자연적인 온도 조절이 가능한 장점도 있다. 와인의 발효와 숙성, 저장이 가능한 크베브리는 인류 최초의 삼위일체형 양조 장비로, 무려 8천년간 사용해 온 고유한 양조 기술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코카서스 산맥이 조지아 북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코카서스 산맥이 조지아 북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러시아와 경계를 이루며 조지아의 북쪽을 우산처럼 덮고 있는 거대한 코카서스(Caucasus) 산맥은 와인을 만드는 포도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의 고향이다. 세계의 거의 모든 양조용 포도는 조지아의 코카서스 산에서 그 뿌리가 시작된 것이다. 고대 해상 무역을 장악했던 페니키아인들은 이 포도를 그리스와 이집트로 전파했고 여기서 다시 이태리와 프랑스 등 구대륙 국가로 전파된 것이다.

포도나무의 세계 전파 역사를 보여주는 그림
포도나무의 세계 전파 역사를 보여주는 그림

고대 그리스인들이 ‘카프카즈’라 불렀던 코카서스산은 매우 신령스러운 장소였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의 분노를 사게 되어 코카서스의 험준한 카즈베기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인 채 형벌을 받게 되는데, 3천년간 날마다 제우스신이 보낸 독수리가 날아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는 끔찍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니콜라-세바스찬 아담스의 프로메테우스, 1762 루브르 뮤지엄
니콜라-세바스찬 아담스의 프로메테우스, 1762 루브르 뮤지엄

이윽고 헤라클레스가 12가지 과업 중 11번째인 헤스페리데스 정원의 황금사과를 훔쳐오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로메테우스를 찾게 된다. 헤라클레스가 바위산에 당도하여 화살로 독수리를 쏘아 죽이고 쇠사슬에 묶인 포박을 풀어 프로메테우스를 자유롭게 하였다. 그 대가로 프로메테우스로부터 황금사과를 훔쳐오는 방법을 알게 된 그는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거인 아틀라스를 찾아가 대신 하늘을 받치고 있을 테니 황금사과를 갖다 달라고 하는데, 오직 아틀라스만 황금사과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금사과를 훔쳐 온 아틀라스는 맘이 변하여 헤라클레스에게 하늘을 떠받치는 짐을 떠 넘기려 하자,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들은 대로 ‘어떻게 해야 잘들 수 있는지 시범을 보여 달라’고 했고, 이 말에 속아 우쭐해진 아틀라스가 하늘을 드는 시범을 보이는 순간 헤라클레스는 유유히 빠져 나오게 된다.

토마스 콜의 Prometheus bound, 1920 Google Art Project
토마스 콜의 Prometheus bound, 1920 Google Art Project

헤라클레스 덕분에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형벌을 유지하기 위한 상징적인 징표로 그를 묶었던 바위와 쇠사슬의 일부를 잘라 반지를 만들어 끼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류가 반지를 끼게 된 신화적인 기원이라고 한다. 인간을 위해 3천년의 형벌을 감내했던 그의 위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우리는 반지를 끼게 된 것이다. 뉴욕의 관광명소 록펠러 센터 아이스링크의 전면에 세워진 큰 황금 동상은 바로 이 신화를 형상화한 것이다. 인류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와 코카서스산, 그리고 반지 모습의 둥근 테두리로 구성된 이 동상은 뉴욕에서 한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인데, 동상에는 이런 깊은 의미가 숨어있다.

뉴욕 록펠러 센터의 프로메테우스 동상
뉴욕 록펠러 센터의 프로메테우스 동상

3천년간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이 파 먹히는 고통을 당했지만 그는 신이라 죽지 않았고 다음날이면 간은 다시 싱싱하게 재생되었다. 우리가 날마다 와인을 마시고 간을 혹사하는 것은 아마도 프로메테우스의 지고한 인간사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무의식적인 리추얼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와인을 마셔야 하는 가장 그럴듯하면서도 고상한 변명이라 할 수 있겠다.

나리칼라 요새에서 본 트빌리시
나리칼라 요새에서 본 트빌리시

조지아는 동쪽으로는 카스피해와 서쪽으로는 흑해를 끼고 있으며 동부 유럽과 서부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로 번영을 누리던 곳이었다. 예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중요한 전략적 교통 요지로, 수많은 이민족으로부터 침탈을 당하기도 했다.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동남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이 있고, 서기 4세기경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현재까지 조지아 정교를 유지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수많은 성당들이 이들의 독실한 신앙심을 말해주고 있다.

트빌리시 성 삼위일체 성당
트빌리시 성 삼위일체 성당

조지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인물은 바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완성자인 스탈린이다. 하지만 그는 조지아 사람들로부터 큰 원성을 사게 되는데, 자신을 낳고 길러준 고향을 배신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는 코카서스 산맥 남쪽 기슭의 쿠라 강 계곡 해발 고도 5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트빌리시란 ‘따뜻한 물’이라는 뜻으로, 온천이 솟아 나는 따뜻한 산자락에 고대의 왕이 도읍을 정한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온천이 있는 트빌리시의 공중탕
온천이 있는 트빌리시의 공중탕

현대적 의미의 조지아 와인 양조가 시작된 것은 19세기초 러시아인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은 부르고뉴 와인보다 조지아 와인을 더 높이 평가하면서 러시아에서 프리미엄 와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몰도바와 함께 2대 와인 공급기지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91년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그루지아에서 조지아로 국명을 변경하게 되었지만 연방 해체로 인해 소비 시장을 잃게 되었는데, 2003년 소위 장미 혁명(Rose Revolution)이라는 무혈 혁명을 통해 친 서방 정책으로 선회함으로써 러시아와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국경 분쟁과 경제적 탄압을 받게 된다. 특히 2006년부터 7년간 러시아가 조지아 와인 수입을 금지하자 최대의 와인시장을 잃는 불운을 겪게 되지만, 오히려 시장 다변화 노력과 품질개선에 집중함으로써 자생력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1878년 설립된 카르틀리의 샤토 무크라니 전경
1878년 설립된 카르틀리의 샤토 무크라니 전경

조지아의 고유한 적포도 품종인 사페라비(Saperavi)와 알랙산드로울리(Aleksandrouli), 화이트 품종인 므츠바네 카쿠리(Mtsvane Kakhuri), 르카치텔리(Rkatsiteli), 키크비(Khikhvi), 키시(Kisi) 등은 맛과 향이 뛰어나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수출 시장에서 독특한 개성을 인정받게 되었는데, 조지아 와인의 미래 잠재력은 526종이나 되는 고유 품종의 다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페라비를 포함, 다양한 종류의 조지아 레드와인
사페라비를 포함, 다양한 종류의 조지아 레드와인

레드 와인은 조지아의 대표 품종으로 카헤티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다. 잉크처럼 짙고 진한 보라색을 띠며 상쾌한 산미와 더불어 블랙베리, 자두, 감초, 담배, 향신료의 풍미에 숙성이 되면 숲속 바닥, 홍차, 구운 육류, 다크 초콜릿의 풍미 특성을 보인다. 포도는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과, 특이하게도 포도속의 과육까지 붉은 색을 보이는데 이 때문에 색상이 짙고 타닌이 강하지만 오래될수록 부드럽고 밸런스가 좋아진다. 대부분 드라이한 스타일로 만들지만 스위트, 세미 스위트, 로제 와인까지 만들 수 있는 다양성의 장점이 있으며 조지아 사람들은 에 특별한 약효 성분이 있다고 믿으며 옛날부터 가장 즐겨 마시는 와인 중 하나로 꼽는다.

카르틀리의 Kapistoni 와이너리의 화이트 와인 품종별 시음
카르틀리의 Kapistoni 와이너리의 화이트 와인 품종별 시음

화이트 품종으로는 르카치텔리(Rkatsiteli)를 꼽을 수 있는데, '붉은 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포도는 연한 분홍색을 보이며 재배가 용이하고 산도를 적당히 유지하면서도 높은 당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 다양한 스타일로 양조가 가능하다. 향이 좀 약한 편이라 므츠바네 카쿠리를 블랜딩하여 향미를 개선하기도 한다.

르카치텔리, 므츠바네 등 크베브리 와인
르카치텔리, 므츠바네 등 크베브리 와인

르카치텔리는 감귤류, 모과, 사과, 은은한 꽃향기를 지니며, 젖산발효를 생략하여 산미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 방식인 크베브리로 숙성한 와인은 6개월 정도의 껍질 접촉으로 풍미와 질감이 개선되며 깊고 짙은 과일 풍미와 오렌지 마멀레이드, 꿀, 말린 살구, 허브, 스파이스 같은 향이 올라온다. 화이트 품종은 오랜 크베브리 숙성으로 짙은 호박색을 보이는데, 이 때문에 앰버(Amber)와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크베브리 숙성된 앰버 와인의 색상
크베브리 숙성된 앰버 와인의 색상

포도를 으깨어 크베브리에 담고 껍질, 씨와 함께 발효시켜 6개월간 숙성하면 껍질이 부유물과 함께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자연적인 여과가 이루어진다. 와인은 가라앉은 찌꺼기와 분리하여 다른 크베브리로 옮겨 추가 숙성을 하거나 바로 병입하게 된다. 일부 와이너리에서는 청포도의 줄기만 제거하고 포도알을 통째로 크베브리에 넣어 숙성하는데, 맛이 더욱 부드러워 진다고 하며, 6개월 후에 건더기를 압착하여 블랜딩한다고 한다. 적포도의 경우는 6개월이 아닌 최대 40일 정도 껍질과 접촉한 후 걷어내고 와인만 숙성(총 6개월 정도)하게 되는데, 껍질과의 접촉을 더 오래하게 되면 색상과 타닌이 너무 많이 추출되어 쓴 맛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크베브리 방식의 와인은 조지아 전체 와인 생산의 약 5% 정도로, 조지아의 전통 양조방식이자 가장 상징적인 조지아의 양조 특성이라 할 수 있지만, 다분히 노동집약적이고 대량생산이 어려운 탓에 대부분의 와인은 현대적인 유럽 방식으로 만든다.

카헤티 슈미 와이너리 포도밭
카헤티 슈미 와이너리 포도밭

EU의 와인 규정을 채택하여 생산지역과 관련된 와인을 정의하고 있는데, 현재 24개의 원산지 보호 명칭(PDO) 지역이 등록되어 있다. 전체 포도밭 면적은 총 55,000 헥타르로, 이중 77%가 동부 지역의 카헤티에 집중되어 있고, 15%는 서부 흑해 연안의 이메레티 지역에, 4%는 카르틀리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조지아의 연간 생산량은 약 2억 리터로 90% 이상의 와인이 카헤티에서 나온다. 청포도 품종인 르카치텔리가 총 와인 생산의 54%, 사페라비가 35%를 차지하는 등 특정 품종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현재 약 2,300여개의 와이너리가 활동하고 있으며 2022년 기준 66개국에 2.5억불의 수출 실적을 보였다.

카헤티 슈미 와이너리에서의 오찬
카헤티 슈미 와이너리에서의 오찬

이번 조지아 와이너리 여행은 조지아 와인청(Georgia National Wine Agency)의 초대로 국내 와인 수입사와 기자단으로 구성된 12명의 멤버가 11월 5일부터 5일간 조지아 핵심 와인산지인 카헤티의 바지수바니(Vazisubani), 트빌비노(Tbilvino), 볼레로&컴퍼니(bolero & Company), 쉴다(Shilda), 바지아니(Vaziani), 슈미(Shumi), 르트벨리시(Rtvelisi), 츄비니(Chubini) 등 8개 와이너리와 카르틀리(Kartli)지역의 샤토 무크라니(Chateau Mukhrani), 카피스토니(Kapistoni) 와이너리 등 2군데를 방문하여 포도밭과 양조 설비를 돌아보고 와인메이커와 함께 다양한 와인을 시음하며 그들의 양조 철학과 와인메이킹 과정, 와인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샤토 무크라니의 와인 숙성고
샤토 무크라니의 와인 숙성고

방문 첫날에는 트빌리시의 코트야드 메리어트 호텔에서 30여개 와이너리로부터 프레젠테이션과 시음행사가 진행되었는데, 멀어서 직접 가지 못한 조지아 서부의 바투미(Batumi), 이메레티(Imereti) 생산지역과 북서부의 암브로라우리(Ambrolauri) 지역 등 다양한 PDO 생산자들의 와인을 시음해 볼 수 있었다.

카헤티 비지수바니 에스테이트
카헤티 비지수바니 에스테이트

늦가을 울긋불긋한 단풍이 든 포도밭에서의 오찬, 크베브리에서 직접 뽑아 낸 와인 시음, 전통 음식으로 푸짐했던 와이너리 정원에서의 저녁 만찬 등은 따뜻한 마음씨와 와인에 대한 진정성을 가진 조지아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인상과 함께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조지아 와인뿐만 아니라 조지아의 특별한 역사와 문화, 음식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값지고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김욱성은 경희대 국제경영학 박사출신으로, 삼성물산과 삼성인력개발원, 호텔신라에서 일하다가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어 프랑스 국제와인기구(OIV)와 Montpellier SupAgro에서 와인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25개국 400개 와이너리를 방문하였으며, 현재 '김박사의 와인랩' 인기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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