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학교의 졸업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의 실무 경험을 위해 몇 개월간의 인턴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문을 제출하고 발표를 하여 일정 점수를 획득하는 것이 요건 중 하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인턴쉽 장소로 와인 카브(Cave)나 샤또(Château) 혹은 레스토랑 등 와인 관련 시설을 선택한 반면 나는 뜬금없이 럼(Rum)을 선택했었다.

보르도는 와인의 수도지만, 17세기부터 시작되어 18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럼 무역으로도 유명하다. 그 항구 무역이 성행했던 샤르트롱(Chartrons)가(街)를 지나가던 중 우연히 보르도 유일의 럼 카브 “라 프티트 마르티니크(La Petite Martinique)”를 발견했을 때,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 카메룬계 프랑스인 주인에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내밀었다. 증류주의 일종인 럼을 배움으로써 와인에 한정된 지식 세계를 좀 더 넓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규모로 운영되어 특별히 직원이 필요하지 않아 난감해하던 주인에게서 며칠 후 연락이 왔다. 프로모션과 마케팅을 위해 보르도 중심가에 컨셉 부티크를 열 예정인데 그곳에서 판매와 매장 관리를 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외국인 학생으로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그 당시에는 몰랐다. 바쁜 주인은 이틀에 한 번씩 저녁 시간에만 나타나 그날의 고객 동향과 판매 상황만을 묻고 사실상 고객 응대와 가게의 문을 열고 닫는 일 등 모든 관리를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럼을 알기 위해 각종 책과 잡지를 보며 익히던 일은, 늘 와인만 공부하던 내게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가르침을 먼저 받는 것보다 우선 혼자 익히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타입인 나는 가끔(?) 만나는 주인에게서 경험이 알려 주는 속 시원한 답을 듣는 시간이 좋았다. 그리고 고객에게 설명하기 위해 달달 외웠던 클레멍(Clément), 생 제임스(Saint James), 트루아 리비에르(Trois Rivière), HSE 등 럼의 각종 브랜드들과 그 특징들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프랑스인 고객들과의 만남이다. 내가 아는 한 소심하기로 치면 서양인 중 프랑스인이 제일이지 아닐까. 누가 길을 막고 서 있어도 길을 비켜 달라고 말을 하느니 길을 비켜 주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매장 문을 서슴없이 열고 방문할 리 없다. 쇼윈도에 전시된 병을 바라보다가도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웃음을 짓고 가던 길을 재촉하기 바빴다.

이럴 때는 과감히 문을 열고 나가 손님에게 말을 걸어본다. “어때요? 병이 향수병처럼 예쁘지요? 럼을 좋아하시나 봐요?”라고 물으면 한두 마디 반응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매장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는데, 대부분은 호기심에서 들어올 뿐 어리둥절한 상태다. 맥주처럼 도수가 낮아 캐주얼 하게 마시는 게 아닐뿐더러 칵테일의 재료라고 여겨질 뿐 단독으로 즐기는 음료라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럼을 잘 모르듯이 그들도 잘 모른다. 그리고 방문객들은 거의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나는 내 나름의 지식을 바탕으로 열심히 외운 문장을 어르신(?)고객들께 되풀이해 말했다.

“럼은 아무래도 아그리콜 럼(Rhum Agricole)을 최고로 쳐요.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Martinique) 같은 프랑스령 섬에서 사탕수수 즙을 그대로 발효한 거거든요. 설탕을 만들 때 나오는 부산물인 당밀을 발효해 증류한 다른 일반 전통적인 럼(Rhum industriel/traditionnel)보다 훨씬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풍미가 좋으니까요. 이 마르티니크 AOC 마크 보이세요? 유일하게 럼에 붙는 원산지 호칭표시랍니다.“

동양에서 온 사람이 프랑스령 섬들에서 생산하는 럼의 우수성을 설명하니 기분이 좋았던 걸까? 몇몇 고객들이 나의 응대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내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마르티니크 라는 섬의 이름을 듣고 반가워한다. 프랑스령이기 때문에 예전에는 흔히들 가는 바캉스 장소였다고 한다. 마르티니크란 이름이 그들의 추억을 자극했나 보다.

젊었을 적 가족과 자주 가던 휴양지로 프랑스랑은 비교도 안 되게 천국 같은 곳이라면서 아직 가보지 못한 나를 측은해 하던 할아버지부터, 딸이 그곳에서 결혼해서 살고 있다 하시더니 한동안 말이 없던 아저씨까지… 나는 그저 “아 그런가요? 저런 그랬군요, 지금은 혼자 사시나요?” 따위의 추임새를 넣곤 했다.

프랑스어가 부족해서 더 많은 말을 할 수 없던 나를, 듣는 데에 꽤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상대할 때에 생글생글한 미소는 어디에나 통하는 것 같다. 달리 뭐 어쩌겠는가. 아무튼 평일 낮 적적한 시간을 때우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어른들로부터 나는 명함을 비롯하여 몇 번이나 그들의 연락처를 받았다. 럼을 배송하는 주문 전화번호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의 관심은 럼이 아니라 시간 날 때 함께 할 친구였던 것이다.

한 번은 찢어진 청바지와 역시 각종 화려한 징이 박힌 청 자켓을 입어 외모부터 범상치 않은 은발의 신사분이 가게에 방문한 적이 있다. 어쩌다 가끔 럼을 마신다는 그는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알려주며 곧 있을 그의 전시회에 구경 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후에 그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올려진 그의 난해하고 지나치게 파격적인 작품에 놀라 소심한 나는 차마 전시회에 갈 생각을 못 했다.

또 한 번은 시원한 숏컷이 잘 어울리는 중년 여성이 들어온 적이 있다. 그녀는 여러 가지로 잊을 수가 없는 고객인데 그중 하나는 그녀가 대학에서 강의하는 전공과목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듣던 고고학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것이다. 역시 교수인 그녀의 남편이 남미에서 살고 있다고 하길래 자연스레 나는 “남편분이 그립겠어요”라고 한마디 던졌다. 무표정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잠시 당황했다. 쿨하게 혼자 사는 삶을 즐긴다는 그녀도 나에게 가끔 만나 이야기를 하자며 그녀의 전화번호를 남겼다. 그리고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

▲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림=송정하>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산책하던 중,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 밑 벤치를 하나씩 차지하고 띄엄띄엄 앉아 계신 할아버지들을 보니 그때 생각이 났다. 너무 일찍 떠지는 눈에 새벽부터 아침이 너무 긴 어르신들은 오늘 하루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방문하실까? 우연히 들른 가게의 점원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그 즐거운 만남이 내일도 계속되길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때 그 인턴 시절, 내게 연락처를 줬으나 하필 너무도 수줍음이 많은 나에게서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던 어르신 고객들에게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모두들 안녕히 잘 계신가요?”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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