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것들에는 변화가 있다. 하지만 ‘와인’만큼은 전통을 뒷받침하여 이어나가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와인 업계를 이끌어나갔던 사람들의 노력이 없이는 현재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와인은 존재할 수 없다.
2022년에는 수많은 와인 업계의 전설들이 별이 되었다. 소믈리에타임즈는 그들의 일생 동안 와인 업계의 발전을 위해서 해왔던 노고를 기린다.
샴페인 하우스 떼땅져의 전설, ‘끌로드 떼땅져(Claude Taittinger)’

끌로드 떼땅져(Claude Taittinger)는 20세기 후반 샴페인 하우스 ‘떼땅져(Taittinger)’를 이끌었다.
1949년 2월, 22세의 나이로 가업에 뛰어든 그는 지난 1960년 형 프랑소와(François)가 사고로 사망한 후 와이너리를 맡아 2005년까지 운영하는 것은 물론, 60년대 후반 콩코드 호텔(Concrde Hotels)과 바카라 크리스탈(Baccarat Crystal)을 포함한 소씨에떼 뒤 루브르 그룹(Société du Louvre)의 회장을 맡았다. 또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지금은 사라진 샴페인최고생산자협회(Syndicat de Grandes Marques)의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2006년 소씨에떼 뒤 루브르 그룹이 해체되고 샴페인 하우스를 크레디트 아그리콜(Crédit Agricole)에 매각하며 은퇴했다.
이후, 그의 조카 피에르-에마뉴엘 떼땅져(Pierre-Emmanuel Taittinger)가 2007년 초 가업을 다시 인수하며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보르도의 전설적인 와인메이커 '안토니 바르통(Anthony Barton)'

샤토 레오빌-바르통(Château Léoville-Barton)과 샤토 랑고아-바르통(Château Langoa-Barton)의 오너로 알려진 안토니 바르통(Anthony Barton)은 와인 산업에서 많은 유산을 남겼다.
안토니와 그의 가문은 매력과 야망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조상 토마스 ‘프렌치 톰’ 바르통(Thomas “French Tom” Barton)은 1725년 보르도에서 무역 회사를 차려 성공적인 가족 사업으로 탈바꿈하였다. 그 후, 사업을 이어 받았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잃을 뻔한 토마스의 손자 휴(Hugh)는 더블린으로 도피하여 회사 소유권을 프랑스의 운송 파트너 다니엘 게스티에르(Daniel Guestier)에게 양도하였다. 그 후, 상황이 안전해졌을 때 휴는 프랑스로 돌아와 1821년 샤토 랑고아(Château Langoa)를 인수했다. 5년 후, 바르통 가문은 레오빌(Léoville) 포도밭의 많은 부분을 인수하여 샤토 ‘레오빌-바르통(Château Léoville-Barton)’를 만들었다.
수십 년 동안 업계에서 도전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던 안토니 바르통은 처음에는 바르통 & 게스티에(Barton & Guestier)에서 근무했으며, 지난 1954년 씨그램(Seegram)이 지분 50%를 인수했을 때, 1967년까지 수출 이사로 일하다 자신의 네고시앙 사업인 ‘Les Vins Fins Anthony Barton’를 시작하였다.
그후 1986년 안토니는 자신의 삼촌으로부터 샤토 레오빌-바르통과 샤토 랑고아-바르통을 상속받아 자신의 아내와 함께 샤토에서 살았으며, 그의 딸 릴리안(Lilian)은 네고시앙 사업을, 안토니는 포도원 개선에 전념하였다.
캘리포니아 피노누아 개척자, 와인메이커 '조쉬 젠슨(Josh Jensen)'

조쉬 젠슨은 칼레라 와인 컴퍼니(Calera Wine Company)의 오너로 피노누아 품종을 미국의 훌륭한 고급 와인 중 하나로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초,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옥스퍼드에서 사회인류학 석사 학위를 공부하던 중 와인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발견했다. 그 뒤 DRC, 도메뉴 듀작과 같은 명성 높은 와이너리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1974년 3,278피트 높이의 할란산의 가파른 경사면에서 2년 전부터 찾고 있던 석회암 토양 부지를 발견했고, 1975년 피노누아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샤도네이, 비오니에 등을 재배하며 지역을 확장했다.
조쉬 젠슨의 딸 실비 젠슨(Silvie Jensen)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진정한 원조'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그는 특출나고, 몽상가였고, 이상주의자였고, 관대한 영혼을 지녔으며, 친구, 공동체, 가족에게 헌신했다"라고 말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정과 진실, 공정함, 좋은 음식과 와인, 그리고 땅의 관리자라는 이상을 위해 헌신했으며, 우리 모두는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라고 추모했다.
시칠리아 와인 업계의 전설, '루치오 타스카 달메리타(Lucio Tasca d’Amerita)'

지난 25일, 시칠리아의 토착 생산자 타스카 달메리타(Tasca d'Almerita)의 전설적인 와인메이커 루치오 타스카 달메리타(Lucio Tasca d’Amerita)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40년 1월 9일 팔레르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운동선수였고,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이탈리아 승마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그의 세계적인 비전은 자신의 회사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섬 전체를 와인 사업의 미래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그는 1979년 아버지 주세페를 설득하여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도네이를 재배하였고, 다양한 연구 끝에 시칠리아 카베르네와 샤르도네를 세상에 소개하였다.
또한, 그는 기술에 있어도 선구자였다. 1998년, 그의 지도력 아래 타스카 달메리타는 와인 제조 과정을 미세 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소프트웨어를 도입한 세계 최초의 와이너리 중 하나가 되었다.
전설적인 와인 전문가, 클라이브 꼬떼스(Clive Coates) MW

1971년 마스터 오브 와인(Mater of Wine)가 된 그는 올해 3월 열린 시상식에서 50주년을 기념했었다.
1964년, 보르도 방문 및 와인 여행 장학금을 계기로 호텔 무역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경력을 시작한 꼬떼스는 보르도 및 부르고뉴에 대한 주요 논문 및 저서를 저술하며 세계적인 권위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와인 소사이어티 및 브리티시 트랜스포트 호텔을 거쳐 말메종 와인 클럽을 설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꼬떼스는 1984년부터 2005년까지 독립 와인 잡지 '더 바인(The Vine)'을 발간했으며, 프랑스 정부로부터 와인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농업기사 작위(the Chevalier de l’Ordre du Merite Agricole)를 수여받았다.
프랑스 알자스 와인 업계의 전설, '앙드레 위겔(André Hugel)’

1929년 8월 19일에 태어난 앙드레 휘겔은 가업에 일찍 합류하여 그의 두 형제와 함께 와이너리의 성장을 도왔다. 현재 사유지는 가문의 12세대와 13세대인 마크, 마크-앙드레, 장-프레데리크 위겔이 운영하고 있지만 ‘그로시 로이에(Grossi Laüe)’ ‘쉘하머(Schoelhammer)’와 같은 상징적인 와인들을 탄생시켰던 그는 말년까지 일해왔으며, 최근 몇 년간 파미유 위겔의 역동성에 큰 기여를 해왔다.
앙드레 휘겔은 1978년 리크비르 고고학회 회장, 1979년에는 알자스 와인 및 포도원 박물관 회장,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시의원을 지냈다. 또한, 와인 재배 역사에 대한 열정 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에 징집된 알자스인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해당 분야에 대한 그의 연구는 여러 출판물로 이어졌다.
러시안 리버 밸리 피노누아 와인의 선구자, '조 로키올리 주니어(Joe Rochioli Jr)'

1987년 로키올리 가문이 그들의 이름을 딴 라벨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척했고 빠르게 캘리포니아의 최고의 피노누아 생산자 중 하나임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 현재까지 명성 있는 와이너리로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마을의 스포츠 스타였던 그는 대학과 육군 생활을 제외하고는 모두 와인을 위해 인생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사업을 물려받은 그는 포도밭의 품종을 확장하기를 원하여 소비뇽 블랑을 심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소비뇽 블랑이 아닌 나머지 포도나무를 모두 뽑아 피노누아를 심기 시작했다. 현재 128에이커 중 64에이커에서 피노누아가 재배되고 있는데, 약 50%는 로키올리의 와인을 만드는 데 사용되며, 나머지는 저명한 와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수요가 높은 윌리엄 셀럼(Williams Selyem)과 게리 패럴(Gary Farrell)를 포함한 다른 와이너리에 판매된다. 오늘날에는 로키올리 피노누아를 구매하고자 하는 메이커들의 대기자들이 있을 정도이다.
투벅척 와인 창시자, '프레드 프란치아(Fred T. Franzia)'

프란치아(Franzia)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1906년 테레사 프란치아(Teresa Franzia)에 의해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박스 와인 브랜드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후 프란치아 브랜드가 팔렸을 때 후손인 프레드 프란치아(Fred Franzia)는 브론코와인컴퍼니(Bronco Wine Company)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으며, 2002년 브론코는 트레이더조 슈퍼마켓에서 ‘찰스 쇼(Charles Shaw)’라고 불리는 새로운 와인 브랜드를 출시했다. 이후 1.99달러 와인 즉 ‘투벅척(Two Buck Chuck)’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며 저가 와인의 혁명이 탄생했다.
브롱코와인컴퍼니는 지난 1973년 프레드와 그의 형제 및 사촌이 와인 소비자를 위한 가치 있는 고품질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비전으로 설립했으며, 비전의 핵심은 와인이 모든 미국 가정 내 식탁에서 즐기고 소비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의 비전은 성공적이었다. 브롱코와인컴퍼니는 현재 와인 및 기타 알코올음료를 포함한 100개 이상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으며, 와인스펙테이터는 해당 회사가 작년에 340만 케이스(cases, 750ml 와인 12병)를 판매하며 미국에서 13번째로 큰 와인 회사라고 밝혔다. 또한, 투벅척 와인으로 알려진 찰스 쇼 브랜드만 해도 약 100만 케이스가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파밸리 와인 업계의 전설, ‘마가렛 덕혼(Margaret Duckhorn)’

그녀는 현대 나파밸리 와인 업계에서 상징적이고 선구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메를로(Merlot)를 북미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종 와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전 남편인 댄과 함께 1976년, ‘덕혼 빈야드(Duckhorn Vineyard)’를 설립하였다. 많은 나파 밸리 와이너리들이 메를로를 블렌딩 포도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덕혼은 메를로라는 품종이 북미에서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은 물론 캘리포니아에서 큰 잠재력이 있다고 믿었고, 이 결정은 오늘날 메를로를 신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인정받는 품종 중 하나로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덕혼의 와인은 2017년 와인 스펙테이터의 올해의 100대 와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미국 프리미엄 와인의 기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남호주 와인 업계 전설 '프란시스 다렌버그 오스본(Francis d’Arenberg Osborn)'

그는 1926년 12월, 어머니 헬레나 다렌버그 오스본(Helena d’Arenberg Osborn)과 아버지 프란시스 어니스트(Francis Ernest)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스본 부부는 1912년부터 남호주에 위치한 사유지에서 포도나무를 가꾸기 시작했고, 다렌버그는 16세라는 어린 나이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 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공식적인 와인메이킹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여러 시행착오와 이웃 생산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을 통해 와인 양조를 배웠으며, 1959년 자신의 이름을 딴 ‘다렌버그(d’Arenberg)’ 브랜드를 시작하였다. 이 이름은 어머니인 헬레나 다렌버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기도 하다. 그 후 와이너리는 성공 가도를 달렸으며, 70개 이상의 빈티지를 감독하며 가족 사업을 국제적인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d’Arry는 지난 2004년, 맥라렌 지역과 와인 산업을 발전시킨 노고를 인정받아 ‘오더 오브 오스트렐리아(the Order of Australia)’ 메달을 수상 받았다.
현재 와이너리는 1984년부터 포도원을 맡아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 d’arry의 아들 체스터 오스본(Chester Osborn)이 맡고 있으며, ‘The Amazing Sites’, ‘The Ancients’, ‘The Artisans’ 등 업계에서 인정받는 60여 가지 이상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