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 안내 표지판은 하얀 바탕에 빨간색의 안내표지판과, 그보다는 더 무게감 있는 ‘불취무귀’라는 화강암 음각 사인.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자로 쓰여 있지 않으니 한국어가 짧은 치에는 무슨 뜻인지 알 도리가 없어 한주에게 묻는다. 

“불취… 무귀? 무슨 뜻이야?” 
“무서운 말이지. 여기는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하는 곳이야.” 

한주가 맥락으로 보면 분명 농담인데 표정을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한 어투로 설명했다. 

“그거 아주 좋네. 기백이 느껴져. 마치 한주 업계의 사무라이 같은 기백!” 
“흠, 사무라이의 기백이라… 취하지 않으면 할복이라도 해야하는 건가?”

역시 표정과 어투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면 분명히 농담이구나 싶은 말을 하며 주차장으로부터 돌계단을 올라선다. 둘러보니 여기는 앞의 두 곳과는 비교할 수 없게 넓다. 눈에 들어오는 건물만도 서너 동, 아니 계단을 올라서서 살펴보니 여남은 동은 되는 듯하고, 뒤돌아 보니 주차장 쪽에도 벌써 건물이 두어 동이 더 있다. 게다가 분명 사람손을 타서 제법 가꿔진 정원이랄까, 그런 부분이 또 수천 평은 돼 보인다. 일본의 쿠라(藏)들 중에서도 이렇게 큰 곳이 별로 없다. 게다가 건물들도 분명 신경 써서 지은 아름다운 집들이다. 

“어이구, 류 대표 어서 와요!” 

예술의 조인숙 ‘회장님’이 양조장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일행을 반긴다. 사실 정식 직함은 이사지만 농반 진반으로 회장님으로 부르는 것은 두루의 구은경 이사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부인들 말 잘 듣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사장님들이 부르기 시작한 호칭이다. 

“네 회장님 잘 지내셨어요? 여기는 일본에서 오신 월드 니혼슈의 치에 씨예요.” 
“안녕하세요, 닛타 치에입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조장이 참 규모도 크고 아름답네요.” 

“응, 우리가 아주 이 양조장에 둘이 매달려서 아둥바둥 하거든” 

조 이사가 하는 말이 농담만은 아닌 게, 5천 평 되는 경내를 둘이 관리하는 일은 한주가 보기에는 경이롭기만 하다. 양조장에서 술을 빚는 것만 해도 어지간한 중노동이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직원을 쓰기에도 또 애매한 상황이라는 건 왕래가 잦은 한주니만큼 알고는 있지만. 

“손님들 오셨어?” 

아래층에서 정회철 대표가 올라오는 소리가 난다. 치에가 역시 타고난 붙임성으로 계단 초입으로 나가서 정대표를 맞는다. 이렇게 어디 가나 주인공 같은 자리를 잘 잡고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게 치에의 특기. 그러면서도 전혀 불쾌하거나 거만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사실 그 기술이랄까, 능력은 정말 타고난 것을 반짝반짝 닦은 수준이다. 

“안녕하세요, 치에입니다. 정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은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우리 술 드시러 오셨다고요.” 
“네, 홍천에 좋은 술이 많다고 해서 왔어요.” 
“홍천이 술이야 좋지요. 자, 일단 앉아 보세요.” 

자리에는 이미 시음용 잔이 놓여져 있었다. 정대표가 냉장고를 뒤져 2종의 술을, 그리고는 찬장에서 증류주 한 종을 꺼내 왔다. 

“이화주를 숙성고에서 가져와야겠네.” 

정대표가 다시 숙성고가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이곳 2층의 시음장에서는 양조장 전경과 건너편의 산,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는 좁은 계곡이 내려다 보여 경쾌하고 시원한 기분이 절로 든다.

치에는 우선 눈 앞에 놓인 술 중 탁주 ‘만강에 비친 달’과 청주 ‘동몽(同夢)’을 시음하기 시작했다. 

만강에 비친 달은 단호박이 들어가서 노오란 빛이 아름답다. 일단 그 시각적 요소가 치에의 관심을 끈 모양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다. 유리잔을 들어 비쳐보기도 하고 돌려보기도 하고, 그리곤 노우징, 그리곤 시음.

동몽의 경우도 일반적인 청주보다 빛이 어두운 편이다. 단호박 영향도 있고, 숙성기간이 일반적인 청주보다 긴 영향도 있다. 두 술을 마시고는 치에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이제까지 시음하면서 미소를 보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이제 증류주 , 53도인 쌀 소주 ‘무작(無作)’을 잔에 따르려는 데 정대표가 올라왔다. 손에는 술병이 아닌 초콜릿 상자 같은 것을 들고. 

“아마도 53도 증류주를 마시기 전에 지금 가져오신 것을 먼저 시음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래요 맞아요, 이건 이화주. 이름은 ‘배꽃 필 무렵’이에요. 일반적인 이화주와 다른 점은 홍천의 잣잎 추출물이 들어있다는 거지요.” 
“네 그럼 그것을 먼저 부탁드릴께요.” 

정대표가 작은 스푼과 함께 건넨 것은 잼이나 드레싱 같은 것을 담아주는 작고 투명한 페트 용기, 그 안에 든 것은 요거트와 같은 상태의 하얀 것이다. 

“아, 이게 이화주군요!” 

치에의 목소리에 경탄과 기쁨이 어렸다. 조심스레 한 스푼을 떠서 이것도 역시 눈으로 잘 살피고 코로 노우징을 한 다음 입으로 가져간다. 치에의 손이 조금 떨리는 듯도 하다. 


용어설명 : 쿠라(藏)


니혼슈를 만드는 양조장을 일컫는 말. 사케구라(酒藏)의 줄임말. 양조장은 술을 만들기도 하지만 발효와 숙성의 과정에서 저장하기도 하는 곳이다. 그래서 술을 저장한다는 의미로 ‘쿠라’라고 부른다는 설이 유력하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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