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치에가 오는 날이다. 홍천 터미널로 오면 한주가 픽업을 나가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홍천 터미널 앞에는 차 댈 곳이 없어 길 건너의 농협 파머스 마켓으로 오라고 한다. 한주는 보통 이곳으로 손님을 불러놓고 자신은 조금 일찍 나가서 장을 보거나 하면서 손님을 기다린다. 혹은 손님과 같이 장을 볼 경우도 있고. 이 파머스 마켓이 한주의 입장에서 보면 랠리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치에가 도착하기로 한 시간은 아침 열 시. 파머스 마켓까지는 길을 헤매거나 하지 않으면 10분이 절대로 안 걸릴 것이다. 지도도 전송해 두었고 치에는 한국어도 곧잘 하니까 길을 헤맬 염려는 없겠고, 저녁에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할 터이니 그 준비를 할 장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홍천의 봄은, 아니 강원도 산지의 봄은 서울이나 남녘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늦어서, 4월에 접어들어도 딱히 제철 재료라고 할 것이 많지 않다. 오히려 파종기의 감자값은 하늘 모르고 치솟고 있을 뿐이다. 한창 출하철에는 100그람에 300원도 안 하는 감자가 지금은 850원. 알이 굵은 것으로 서넛 골라잡으면 금방 2킬로가 넘어갈 텐데, 감자 좋아하는 한주지만 오늘만은 감자를 외면하고 만다. 2주 정도, 파종기만 지나면 금방 떨어질 가격이니 좀 참고 기다리면 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먹을 것이야말로 철따라 곳따라 순리대로 먹는 것이 좋다는 평소 소신 때문이다. 제철에 제곳에서 먹으면 싸고 신선하고 맛있다. 비싸다는 것 자체가 지금 먹을 때나 장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버섯이며, 쌈채소며, 이것도 시설 재배이기는 한데 같은 시설 재배라도 제철에는 훨씬 싸다. 거기에 제철이 얼추 된 냉이와 달래 를 챙겼다. 집에 명이는 사둔 것이 있으니 이것이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을 터이다. 계산대에서 값을 치르고 주차장으로 나서는데 뒤에서 누가 등을 척 소리가 나게 친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게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물론 치에다. 치에가 아니면 누구겠나.  

“아 깜짝 놀랐잖아!!”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죄 많이 짓고 사나 봐?” 
“야, 죄 많은 건 내 인생이고 왜 너까지 사람 놀라게 하냐?” 
“어, 진정해. 진짜 많이 놀랐나 보네? 아님 진짜 아팠었던 거야?” 
“아, 그럼 안 놀라냐. 그렇게 퍽 소리가 나도록 등짝을 후리는데?” 
“어 미안미안. 친근감의 표시였을 뿐인데…. 그나저나 이제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아팠던 것도 아니고, 순간이야 놀랐지만 아닌 게 아니라 치에 아니면 누가 이런 만행을 저지르겠나? 한주가 발끈한 것은 놀라서나 아파서가 아니라 치에 특유의 에너지가 뭔가 한주를 방해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주는 조용하고, 생각이 많고, 내성적인 데 반해서 치에는 한없이 밝고,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한주는 그런 치에의 에너지가 좋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쑥 자기 자신의 성향과는 너무 다른 빛이 비칠 때 뭔가 방해가 되는 느낌도 느꼈다. 치에의 밝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자신도 따라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하긴 하지만 말이다.

“술꾼님이 오셨으니 술 드시게 해드려야지. 오늘부터 1박 2일 양조장 투어야. 일단 여기서 가까운 곳으로 가지.” 

“한주 사마 찾아오길 잘했어. 좋은 술 많이 소개해줘.” 
“물론이지. 월드 니혼슈의 치에 사마님께서 만족할만한 술이 여럿 있을 거야.” 

서로 사마, 사마님 하면서 극존칭을 써가며 다시 싱글벙글한 분위기가 되었다. 차에 올라서 불과 10분 정도 가니 한주가 차를 세웠다. 홍천경찰서 사격연습장 앞이다. 

“뭐야? 사격장?” 
“아, 차만 여기 세우는 거고, 조금 걸어 올라가면 양조장이 있어.” 

둘이 걸어서 1분 정도 올라가자 아닌 게 아니라 집이 나타났다. 간판 대신 걸어놓은 현수막들이 아니면 양조장이라고 알아보기도 힘든 곳이다. 

‘미담 양조장.’ 

한주가 처음엔 유리문을, 그다음엔 방충망을 열어젖히며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어 잠깐만 기다려요~.”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아는지 묻지도 않고 안쪽에서도 큰 목소리를 길게 뽑아 답이 나온다. 문 안에 들어선 치에는 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쌀가마니, 독, 병들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천상 양조장이다. 작업장 쪽에서 이 양조장의 주인장, 조미담 선생이 모습을 나타낸다. 

“쌀 좀 씻느라… 어서 와요.” 
“예, 그동안 별 일 없으셨죠?” 
“별 일이 뭐가 있어. 별일이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네. 그런데 누구야? 색시감이야?” 

농담같지도 않은 투로 대뜸 치에를 가리킨다.

“어휴, 별말씀을. 여기는 치에 씨고요, 월드 니혼슈라는 사케 수출업체의 대표입니다. 한국말 잘 하니까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호호호, 아 미안해요. 그런데 진짜 색시감이면 좋겠다.” 

조미담 선생은 일을 하다 나온 듯 젖은 손을 앞치마에 손을 척척 닦고는 치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요. 조미담이에요. 우리가 너무 조그맣고 누추해. 멀리서 왔는데...” 
“네 안녕하세요. 닛타 치에라고 합니다. 양조장이 아늑하고 좋은데요?” 

치에는 조미담 선생의 손을 잡고 흔들고는 명함을 건넸다. 용의주도하게 한글 명함을 준비해왔다. 생글생글 잘 웃고 덤벙대는 느낌도 있지만 사실은 천상 사업가인 치에다. 

“일단 앉아요. 줄건 술 밖에 없는데, 어차피 술 마시러 온 거지?” 
“네 선생님, 한주 씨가 선생님 술을 꼭 마셔봐야 한다고 해서 일본에서부터 왔어요.” 

그것 참 말도 이쁘게 한다. 이렇게 말을 하면 한주도 면이 서고 미담 선생도 기분이 좋을 밖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시음으로 넘어간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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