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양조장은 길매식당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직선거리로는 10킬로미터도 안 되지만 산골을 이리저리 구비구비 가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흘러가는 게 강원도길. 두루 양조장 한켠 공터에 차를 대고 내려서 익숙하게 시음장으로 들어간다. 한주로서는 몇 번이나 와보았고, 어제 전화로 미리 약속도 잡아두었으니 말이다. 김경찬 대표가 시음장 문을 열어주며 반긴다. 

“어서 오세요.” 
“네, 잘 지내셨죠?” 

“안녕하세요, 치에라고 합니다.” 
“네, 일본에서 여기까지 오셨다구요? 환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두 사람이 명함을 주고받는 사이에 구은경 이사가 뒷 편의 양조장으로부터 시음장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양조장에 일이 좀 있어서 맞이가 늦었네요.” 
“네 안녕하세요, 치에입니다.” 

구 이사와 치에는 또 명함을 주고받고, 공손히 맞절하듯이 서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그리곤 자리에 앉았다. 

“치에 씨는 월드 니혼슈라는 사케 수출업체의 대표입니다. 한주에도 관심이 있어서 홍천까지 왔어요.” 

한주가 간단히 치에와 상황을 설명했다. 자세한 얘기는 어제 저녁에 통화할 때 했으니까 구구한 얘기를 할 것은 없다. 

김경찬 대표가 술냉장고에서 술을 꺼내온다. 

“다른 말보다 우선 술을 드셔 보시지요.” 

네 개의 병이 나와있다. 삼선, 애석, 메밀로. 그리고 선식초. 이 집은 술뿐 아니라 식초도 하는 집이다. 김 대표가 우선 삼선을 한 잔 따랐다. 두루의 베스트셀러 탁주이다.

치에는 미담에서와 마찬가지로 경건하다고 할 집중력을 발휘해서 차근차근 시음 단계를 밟아나간다. 우선 눈으로 관찰하고, 코로 향을 음미하고 그리고 술을 조금 입에 머금고 굴리다가 넘겼다.  

“석탄주(惜㖔酒) 인가요? 보통의 석탄주보다 산미가 강한 것이 인상적이고 좋네요.” 
“보통분이 아니시네요. 한 모금만으로 석탄주라는 것도 알아내고.” 

김 대표가 놀란 것은 외국인이라는 것을 감안한 것이겠지만 한주도 내심 놀랐다. 이 여인네, 어디서 한주가 모르는 공부를 하고 온 모양이다. 

“석탄주는 좀 달아서 많이 마시기 어렵지만 산미가 강한 이 삼선은 자꾸 마시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김경찬 대표는 다음 잔으로 맑은술, ‘애석’을 한 잔 따랐다. 

치에는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테이스팅 할 때는 혼자만의 세계를 형성한 듯이 계속 조용히,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의식 같은 동작들을 반복했다. 마침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에 치에가 든 맑은 술잔이 반짝 빛났다. 아름다운 오후의 한 때와, 아름다운 술과, 아름다운 사람이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 이 술도 좋네요. 맑은술은 산미가 훨씬 적은데, 그래도 많이 달게 느껴지지는 않네요. 이건 아마도 감칠맛 덕분이겠죠? 우마미.” 

“네. 청주는 달지 않게 한 편이에요. 산뜻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요.” 

치에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 이제 증류주 차례입니다. 메밀로라는 술이에요.” 

메밀로는 훨씬 작은 잔에 따랐다. 53% 알코올이라서 소주잔 하나 정도만 마셔도 소주 반 병 정도를 마시는 효과다. 시음에는 그 정도 양이 필요하지도 않고, 만약 그런 정도로 몇 잔을 마시면 시음이고 뭐고 취해버릴 게 분명하다. 치에도 이번엔 탁주나 청주를 시음할 때보다 코로 노우징을 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마지막에 입에서 머금고 굴리는 시간도. 그리고 그 혼자만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때?” 

한주가 질문을 던져 침묵을 깼다. 방해를 하고싶진 않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으니까. 결계가 깨져 정신이 든 듯이 치에가 급하게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건 정말 놀라운 술이네. 강해. 아주 인상이 강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이 강함이 계속 유지될 것 같아. 이 강함이 메밀의 향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약간 언밸런스이지만 아마 숙성을 오래 시키면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겠지?” 

치에가 이례적으로 구체적인 평가를 쏟아낸다. 아마 이 술의 뭔가가 치에의 마음속 어딘가를 움직인 모양이다. 

“네 맞아요. 메밀로 말고 용포라는 쌀소주도 있는데, 두 술 다 처음 증류기에서 받아 마실 때가 아주 좋고 그 직후에는 뭔가 좀 거친 느낌이 되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또 반년, 일 년 이렇게 좋아지고요. 아직 출시한 지 오래된 술이 아니라 아주 오래 숙성된 것은 없지만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구은경 이사가 해설을 덧붙였다. 

“한주 씨도 같이 식초 한 잔 해요.” 

김 대표가 식초를 따르며 한주에게 권한다. 봄이지만 갑자기 낯까지 뜨거운 느낌의 훈풍이 부는, 태백준령을 타고 넘어온 높새바람이 부는 날이다. 식초라면 시음도 좀 하고, 물을 타서 음료로 만들어 마시고 싶은 더운 날이다. 네 명이 식초를 따라 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용어설명 : 석탄주(惜㖔酒)


‘삼키기가 아쉽다’는 뜻의 술. 우리나라에서 여러 지역에 널리 전해지는 전통주 중의 하나로 현재 상업양조장중에서 석탄주를 기본으로 술을 만드는 곳도 많다.  

우마미:우리말로는 감칠맛으로 번역되는 일본어. 이케다 키쿠나에 교수가 1908년에 우마미를 식별했으나 오랜 기간 동안 기본 오미만이 인정되다가 최근에 감칠맛 수용기제가 발견되면서 제6의 맛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두루양조장은 아직도 홍천의 그 자리에 굳건히 있으나 제품들은 전면적인 리뉴얼을 거쳐서 이 글에 묘사된 술들은 현재 대부분 생산되지 않는다. 대신 젊은 감각의 '고타'시리즈 막걸리와 '용소주' 시리즈가 출시되었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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