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는 한영이 식사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문을 들어서는 한주와 치에를 보고는 제법 큰 소리로 외쳤다.

“앗! 이쁜 누나다!”
“안녕하세요 닛타 치에라고 합니다.”

한영이 깜짝 놀랐다. 치에의 한국어가 너무 유창해서.

“이쁜 누나 정도까지 하고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누나 니가 하는 말 전부 다 알아듣거든.”

한주가 한영에게 견제구를 날린다. 사람이라는 게 남이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면 의외로 면전에서도 아무 말이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 없도록 긴장 타라는 신호 정도를 보낸 것이지만 말투가 너무나 진지해서 한영은 뜨악한 느낌이 들었다.

“아 네, 이쁘고 한국어 잘 하시는 누나와 인상 잘 쓰시고 한국어도 잘 하시는 형님. 하루 종일 돌아다니시느라 피곤하셨죠? 식사하셔야죠.”

한영이 과하게 엄격한 한주의 반응에 빈정거리며 말을 받았다. 한주는 그 빈정거림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심했다 싶은 것이 있어 별 말을 못 하고 넘어간다. 

“응,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배고프다. 우리 저녁에 뭐 먹지?”

“고기 좀 굽고요, 찌개 끓이고 밥 하고 할까 하다가 하루 종일 시음하시고 다니셨으니 좀 가볍게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김치말이 국수나 할까 해요. 치에 누나 매운 것도 잘 드시나요? 매운 게 싫으시면 오이냉국에 말아도 될 것 같고요.”

“와, 김치말이 좋아해요. 매운 음식도 잘 먹을 수 있습니다.”

치에가 단순 예의가 아니라 반색을 하고 김치말이를 청하는 기색이다. 

“그래 고기 좀 굽고 김치말이 좋겠다. 쌈채는 내가 뜯어다 씻을께.”
“네, 그리고 술은 치에 누나가 고르시는 걸로.”
“그래, 양조장 구경도 할 겸, 한 바퀴 쭉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한주는 말을 마치고는 바로 텃밭으로 나갔다. 

“누나는 이쪽으로 오세요. 신발 갈아 신으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양조장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상업적인 생산을 하는 곳도 아니고, 실험 양조 수준이다. 쌀을 씻고 밥을 찌고 하는 작업공간을 지나 발효실, 누룩방을 둘러보고 나면 바로 숙성고로 들어가게 된다. 단 한 가지 다른 소규모 양조장과 차이가 있는 것은 연구실이다. 연구실이 따로 있는 양조장은 많지 않다. 

“야, 멋지네요 이 연구실은!”

치에가 이번엔 약간의 인사치레가 섞인 칭찬을 했다. 일본의 대형 사케 양조장이나 서구의 와이너리에는 이 정도의 연구 시설은 드믈지 않다. 그리고 양조장 외부의 연구소나 대학 등에서는 시설이며 인력이며 훨씬 더 뛰어난 연구역량들이 있는 것을 익히 보아왔으니 지금 양조장의 연구실에 진심으로 감탄하기는 힘들다.

“뭐 대단한 건 아니죠. 그래도 저희가 이것저것 열심히 실험을 해보고 있긴 합니다. 아직은 뚜렷한 성과랄 것은 없고요, 데이터를 축적하는 과정이에요. 지금 저희 관심사는 안정적인 누룩 생산을 위한 조건을 밝혀내는 것과 술을 장기숙성하는 데서 오는 효과가 어떤 것인지 알아내는 것 등이에요. 그것 말고도 궁금한 것은 많지만 현재로서는 한계가 많죠.”

한영이 조금 멋쩍어하면서 겸손하게, 하지만 똑 부러지게 말했다.

지금 만들어지는 술들은 관능평가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서 데이터를 측정해서 기록에 남는다. 또 관능평가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양한 환경에서 발효하고 숙성시키는 실험을 거친다. 아직까지 한주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곳은 많지 않고, 기본적으로는 ‘감’에 의존하는 편이다. 완전 수작업으로, 양조가의 경험과 감에 의존하고 날씨나 그 해의 쌀, 밀의 작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 술들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럽고 솔직한 술로서 평가받을만하다. 하지만 어차피 술이란 것이, 문화란 것이 자연을 그대로 받아서 옮기는 것은 아니다. 뭔가 더 재미있고 의미있는 술을 만들기 위해서 한주와 한영은 여러가지 궁리를 더하고 있고, 이런 과학적 측정과 실험은 그 과정의 하나이다.

“효모라든가 누룩곰팡이라든가 하는 미생물의 포집과 배양 같은 것도 하고 계신가요? 일본에서는 대체로 효모를 전문업체나 협회에서 사서 쓰긴 하지만 오래된 양조장들 중심으로 자체 환경에서 자라는 효모를 분리해서 배양하려는 것이 요즘 추세에요.”

“네 저희도 그런 관심이 당연히 있지요. 그런데 그건 규모가 좀 더 커져야 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일본의 코지와는 달리 저희는 누룩을 쓰는데 균을 분리 배양하는 것이 맞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 중이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당화와 알코올발효의 모순된 과정을 한꺼번에 한다는 것이 한주의 어려운 점이지만 매력이기도 해서요.”

이렇게 말하며 한영은 어느덧 숙성실의 문을 열었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는 서늘한 숙성실에서는 말할 수 없이 다양한 향기가 사람을 덮치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용어설명 : 효모 배양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효모가 필수적인데 니혼슈 양조장들에서는 대부분이 일본양조협회의 효모를 받아서 사용한다. 출시된 순서대로 협회 1호, 2호라는 식으로 명명이 된다. 최근에는 오래된 양조장들이 양조장 자체의 환경에서 서식하는 효모를 포집해서 배양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효모의 성격이 술의 맛과 향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효모마다 각각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자체 효모를 가지는 것은 술맛의 오리지널리티라는 면에서 분명히 평가할 만한 요소가 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도 연구역량이 늘어나고 있어서 누룩과 술을 만드는 데 새로운 발상과 기술이 속속 도입되고 있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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