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도 음식은 훌륭했다. 소바튀김 샐러드란 필시 자랑하는 소바의 파생요리일 것이다. 그 유명하다는 소바를 먹어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가라아게와 소바의 튀겨진 상태만 봐도 이 집의 내공을 알 수 있다.  

사장님의 추천대로 가라아게와 십칠주를 마셔보니 ‘과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산미가 짱짱하고 무게감까지 있어서 고등어의 감칠맛과도 나쁘진 않겠지만 역시 가라아게쪽이 좀 더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튀김요리의 느끼함을 잡으면서도 씹을수록 어딘가 튀김옷의 녹진함, 닭고기의 담백함, 술의 감칠맛과 무게감이 어우러지게 되는 묘미가 있달까. 이 집 사장님도 역시 내공이 만만치 않은 분이다. 하긴, 소바집에서 술장사라는 것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십칠주도 예의 게릴라 시음회로 옆자리에 나눠주고 반응을 보니 대학생 또래의 자녀와 같이 나온 장년의 부부가 특히나 좋아한다. 일본술에는 없는 맛이지만 보편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다. 오히려 합성감미료의 값싼 단맛에 길들여진 한국인들보다 일본인들이 더 쉽게 프리미엄 한주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제 이 집의 막걸리를 마셔볼 차례다. 잔으로 나온 막걸리를 영규와 건배하며 보니 식혜같이 밥알이 약간 떠 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이유를 알겠다. 가볍기가 필시 한 번에 빚는 단양주일 것 같고, 적당한 탄산도 있고 새큰달큰 하다. 한주가 기분 좋은 취기에 제법 큰 소리로 외쳤다. 

“이건 쉰다리 같은데?” 

“쉰다리요? 쉰다리가 뭡니까?” 

영규가 물었다. 

“쉰다리는 제주도에서 마시는 식혜 같은 음료지. 약간 알코올 도수가 있는 버전도 있고 그냥 식혜같은 버전도 있어. 이건 꼭 쉰다리인데? 하지만 도수는 제법 있군.” 

“네, 이건 7도 정도 되는 막걸리입니다.” 

“이건 어느 양조장에서 만드는 거지?” 

“어디라고 할 건 없고 여기저기서 만듭니다. 교포 1세대의 막걸리 맛을 재현한 술입니다.” 

역시 양조장 얘기는 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밀주일지도 모르겠다. 그야 이쪽에서 알아서들 할 문제고, 밀주라면 그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주의 성향이다.  

한주는 그보다 교포 1세대라는 말에 무릎을 쳤다. 징용 등으로 끌려온 조선사람들 중에는 제주도 사람이 많아서 오사카의 한국음식점 중 오래된 곳은 제주도 스타일이 많다고 들었다. 제주도식 막걸리의 재현이라면 알코올 도수가 좀 강한 쉰다리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일본에 제주도 출신 교포가 많다더니 이건 딱 제주도 스타일의 막걸리군!” 

“아, 제주도에선 이런 막걸리를 마십니까? 저는 몰랐네요.” 

“아니, 제주도에 가면 요즘은 제주막걸리를 마시지. 그냥 아스파탐 들어간 일반적인 막걸리야. 하지만 옛날에는 아마 이런 술을 마셨을 거야. 제주는 쌀이 귀했으니 조나 다른 잡곡이 더 많았을 수는 있겠지만.

제주도 쉰다리는 아직도 직접 담궈 마시기도 하는데 나도 얻어마셔본 적이 있지. 쉰밥으로 만든다고 쉰다리라는 설도 있고, 어쨌든 남은 밥을 활용하는 음료야. 알코올이 없이 식혜같은 것이 일반적이고 알코올이 있는 것이라도 보통은 이것보다 알코올도수가 낮지만, 술로서 막걸리라면 이 정도는 되야겠지. 이것이 교포 1세대의 막걸리의 맛이란 말이지.” 

“네, 나이가 아주 많으신 분이 직접 만드시는 술입니다.” 

그것 참, 재미있다고는 했지만 듣고보니 재미만 찾을 수는 없는 이야기다. 징용 등으로 끌려오거나 돈벌이를 위해 사회의 최하층 생활을 각오하고, 혹은 강요당해 바다를 건넌 조선인, 그 중에서도 특히 제주도 사람들의 맛이 여기 살아났다니, 혀끝의 맛이 아니라 역사의 도도함과 사람의 집념이 함께 느껴지는 맛이다. 이래서 술의 세계란 평론가들이 아름다운 문장 몇 개로 묘사할 수 없는 맛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이 집의 주인장도 교포 2세대나 3세대로써, 그런 역사의 풍파에도 꿋꿋이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지켜온 분일 것이다. 그 무언가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들이 느끼는 것들과는 또 다른 무엇이겠지. 서서히 올라오는 취기에 상념에 빠져있는데 영규가 다시 소리를 높인다.

"형님, 이제 3차 가시지요!"

3차는 일본식 '스넥바' 같은 형태인데, 영규가 누님이라고 부르는 여성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한주는 여기에 왔을 때쯤엔 어제 사케노진에서, 치에와 마신 술까지 누적되어 많이 취한 것은 아니라도 피곤은 심했다. 소파에 무너지듯이 기대어 있는 상태다. 여기서도 그 쉰다리 막걸리가 나왔다.  한 모금 마셔보니 아까 그 술과는 대동소이한 맛이다. 

주량은 이제 거의 다 찼다. 아니 어쩌면 좀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험삼아 여러가지 술을 마시러 왔는데 계속 이 술을 마실 이유는 없어서 다른 것은 없냐 물으니 뭘 줄까 묻지도 않고 병에 담긴 술이 나왔다. 주변에도 대개 이 병이 놓여있다. 병을 들어 살펴보니 희석식 '진로' 소주다. 한국에선 이제 진로가 아니라 참이슬이란 이름을 쓰고 소유주도 바뀌었지만 일본에선 여전히 진로 브랜드로 팔리고 있는 모양이다. 한주는 평소에는 희석식 소주는 마시지 않지만, 병의 라벨이 다른 것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한 잔을 마셨다. 

마셔봤자 25도짜리 희석식 소주다. 25도짜리 참이슬, 혹은 진로 소주를 마셔본 것이 언제던가? 오래되서 그때와 같은지 어떤지 논할 여지는 없고, 다만 그냥 희석식 소주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 잔을 마시고는 말았다. 

희석식 소주 한 잔을 마시니 급격히 취기가 돌았다. 어릴 때는 그저 술이면 좋다고 희석식 소주도 많이 마셨지만 지금의 한주는 이제 희석식 소주는 졸업이다. 좋은 술들을 마시다 보니 희석식 소주의 해악이 직접 느껴지는데, 이렇게 급격하게 취하는 것이 그 중 하나고 가장 심한 것은 다음날의 숙취다. 한주는 이제 여럿이 모이는 자리가 있으면 자기 술을 챙겨가는 정도다. 권하는 소주잔을 거절하느니 이렇게 자기 술을 가져가서 남들에게도 주고 자신도 마시는 것이 말하자면 한주의 술자리 보신법이다. 

희석식 소주 한 잔에 이제 한주의 회로는 마비가 되는 듯하다. 슬슬 졸음이 오고 이제 집에 가자 싶은 차에 영규가 뭐라 말을 건다. 대화는 지속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듣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꼭 꿈속에서 남의 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뭔가, 재미는 있는데 몸과 머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용어설명 : 쉰다리


제주도에서 많이 마시는, 쉰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다음 걸러낸 음료. 자체로 막걸리와 같은 제조원리인데, 쉰다리는 보통 빠르게 발효시켜서 알코올 발효가 충분히 일어나기 전, 탄수화물의 당화부분만 취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알코올 도수가 낮고 술보다는 식혜에 가까운 느낌이다. 또 설탕이나 꿀 등을 넣어 끓인 다음 차게해서 여름 음료로 마시기도 하는데 이 때 알코올 성분은 완전히 날아가게 된다.  

작중의 쉰다리 같은 막걸리는 고두밥에 누룩을 섞어 당화시킨 것을 알코올 발효가 충분히 일어날 때까지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백웅재작가의 뉴스레터 구독 신청https://writerpaik.stibee.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