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을 위한 시간과 공간은 라운지가 아닌 공항 커피숖에서 확보했다. 하네다 공항은 라운지가 없는 대신 공항의 식당이나 카페들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음식도 괜찮았다. 커피는 말할 것도 없고. 

200자 원고지로 20매 정도의 글을 썼으니 비행기 타느라 하루가 뭉텅 잘려나간 날로써는 할 만큼 했다 싶은 기분이 들어 기지개를 쫙 핀다. 허리에서 우득우득 소리가 나는 때에 맞춰 보딩콜이 들린다.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한주는 짐을 챙겨 들고 보딩게이트가 아니라 우선 면세점으로 향했다.

요즘 프리미엄주 시장, 특히 위스키 쪽은 면세점판을 찍어내다시피 하고 있어서 유명브랜드의 경우는 오히려 일반 상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공항을 이용할 때마다 면세점 분위기를 열심히 체크하는 이유기도 하다.  

일본 위스키는 잘 만들기는 하지만 가격이 꽤 비싼 편이다. 연식 표기가 없고 싱글 몰트도 아니지만 면세점 가격으로도 1만 엔이 넘는 야마자키(山崎)의 특별판을 하나 집어 드는 것으로 쇼핑은 완료.

이제 진짜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다. 자리는 맨 뒤쪽으로 지정. 원래 뒷자리가 먼저 타는 법이지만 한국행 비행기는 그런 것 없다고 봐야 한다. 보딩콜이 나오면 다들 바쁘게 줄을 서서 앞자리고 뒷자리고 구분이 없다. 그래서 한주는 아예 맨 뒤로 들어가는 것이 습관이다. 비즈니스나 일등석을 타면 그런 문제는 없겠지만 한주는 돈보다도 일본 같은 단거리 노선에서 비싼 좌석을 타기는 자기가 너무 젊다고 생각하니까. 

맨 뒷자리는 마침 옆자리가 비어서 비교적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이륙하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 벨트를 풀어도 되는 때가 오자 한주는 팔걸이를 올리고 다리를 옆자리로 올리고 몸을 구부린 자세로 옆으로 앉아 창가를 바라봤다. 비행기는 이미 구름 위로 솟아서 석양빛이 가감 없이 창문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이번 여행에서 마셨던 술들을 생각해본다.

 ‘십칠주는 10점 만점에 8.5점. 남성미라면 최고라고 해도 좋겠지. 호오가 갈리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독특하고 일관된 개성이 있어서 팬이 있을 거야.’ 

‘쉰다리 막걸리는 8점. 가볍게 마시기엔 아주 좋은 술이지. 그리고 제주의 쉰다리와 교포 1세대의 맛이 연결된다는 문화적 가치도 있고…,’ 

맛이란 게 혀끝으로 느끼는 것만은 아니라서, 점수는 언제나 개인적인 취향의 점수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군가가 이렇게 꼭 집어 몇 점이라고 평가를 해주길 바란다. 프리미엄주라면 제법 비싸니까 지출하기 전에 믿을만한 가이드가 있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개인 블로그등의 SNS에 이런 평가를 올리는 것이 한주의 일이기도 하다.

‘호랑이 막걸리는 8.5점. 이것도 너무 가볍고 깨끗한 점이 한국인 입맛에는 마이너스 요소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막걸리의 영역을 확장한 술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이런 스타일이라면 대량생산도 가능하겠지.’ 

일본이란 나라에서 얻은 결론은 한국 청주는 일본 청주를 압도하고, 반대로 일본 막걸리는 한국의 저가막걸리들로는 상대도 할 수 없는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사케 하면 당연히 청주를 떠올리고 한국 하면 막걸리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론이다. 그런 아이러니를 깨달은 것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고도 하겠다.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에는 이미 어둠이 완전히 깔린 후였다. 한주는 장기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다. 김포공항에서 차를 몰고 두 시간 정도는 가야 하는 곳, 한주의 집은 강원도 홍천이다.  

나가는 물은 있어도 들어오는 물은 없다는, 물이 많고 물이 좋은 고장이다. 


용어설명 : 면세점판(duty free edition)


주류, 특히 고도주는 생산지 세금도, 관세도 비싸서 면세점 쇼핑의 단골 품목이다. 그러다 보니 최근의 추세, 특히 스코틀랜드나 일본의 위스키 업계에서는 기존 제품보다 비싼 프리미엄 라인을 ‘면세점판’으로 만들어서 매출을 올리고 있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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