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eau Mouton Rothschild) 1982
Chateau Mouton Rothschild) 1982

샤토 무통 로쉴드(Chateau Mouton Rothschild) 1982 라벨은 미국의 영화 감독이자 영화 각본가, 화가이자 배우로 알려진 존 휴스턴 John Huston(1906-1987)의 작품이다. 파리에서 미술학교를 다니며 아티스트로 성장한 그는 프랑스에서 무통 로쉴드의 필리프 남작과도 친분을 쌓았다. 필리프 남작 또한 젊은 시절에는 극작가, 각본가, 영화제작자 등으로 활동했기에 두 사람은 너무나 공통점이 많았고, 남작은 최고의 빈티지에 꼭 그의 그림을 넣고 싶어했다. 80년대에 들어 필리프 남작(1902-1988)의 건강이 악화되었기에 그의 딸 필리핀 여사(Philippine de Rothschild)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멕시코 산간 오지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던 존 휴스턴을 직접 찾아가 1982빈에 넣을 그림을 받아오게 된 것이다.

이 수채화 그림에는 빛나는 태양과 탐스러운 포도송이,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기쁨에 뛰어오르듯 춤추는 숫양을 그려져 있었으며 20세기 최고의 빈티지 중 하나로 알려진 1982빈의 라벨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림 바로 아래에는 휴스턴의 친필로 ‘나의 사랑하는 친구 필리프 남작의 60번째 수확을 축하하며’라는 문구와 그의 사인이 새겨져 있다. 필리프 남작은 1902년생으로 20세가 되던 1922년에 아버지 앙리(Henri de Rothschild)를 졸라 샤토 무통 로쉴드의 총괄 운영을 맡게 되었기에 1982년은 그의 60번째 포도 수확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하며 무통 역사에 가장 빛나는 빈티지로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다.

나도 처음 접하게 된 1982빈은 매그넘 사이즈(1.5L)로 750ml 병에 비해 더 오래 숙성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어서인지 42년이라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코르크 상태도 거의 온전했다. 30분 정도 디캔터에 따르고 잡향을 날린 후 잔에 서빙하기 시작했는데, 와인의 색상과 상태는 잘 숙성된 Old Vintage 와인이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함 그 자체였다. 가장자리에 브라운 색 반영을 띠었고 코어는 약간 흐릿하면서도 짙은 가넷 레드 색상이었다. 노즈에서는 잘 무두질한 가죽과 오래 달인 감초, 무화과, 타바코, 숲속 바닥, 흑연, 흙 같은 삼차향의 바탕 위에 붉은 과일의 따뜻하면서도 농염한 풍미가 피어났다.

팔렛에서는 커피와 민트, 체리로 만든 키르쉬의 달콤한 향과 스파이시한 향신료, 그리고 뚜렷하게 느껴지는 붉은 과일의 단맛이 짙게 베어 났다. 1982년 뜨거웠던 여름과 화창했던 가을의 흔적이 와인 속에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았다. 부드러움 속에서도 잘 발달된 근육을 드러내는 벨벳 같은 타닌과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 듯한 일체감과 밸런스를 가진 맛, 밝고 발랄한 피니쉬를 보인 붉은 과일의 길고 달콤한 여운은 무통 로쉴드 레전드 빈티지 1982 매그넘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포텐셜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1982빈은 까베르네 소비뇽 85%, 까베르네 프랑 8%, 메를로 7%의 블랜딩 비율로 만들어졌고, 로버트 파커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모두 100점 만점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1961년 레전드 빈티지 이후 21년만에 다시 찾아온 보르도 1982년의 기적 같은 날씨 덕분이었다.

1982년 겨울과 봄은 온화하고 건조하여 서리가 발생하지 않았고 5월에도 높은 기온이 이어져 평년보다 12일 일찍 꽃이 피어 25년만에 기록적인 조기 개화현상을 보였다. 7월은 더위와 가뭄이 계속되었지만 포도나무들은 이를 견뎌낼 수 있었다. 다행히 8월은 약간 시원해졌고 월초에 비가 내리면서 밤이 신선해진 덕분에 좀 더 긴 생장기를 가지며 포도가 충실히 익을 수 있었다.

9월은 다시 덥고 화창했으며 기온은 28~30°C까지 올라갔고 9월 16일부터 무통 로쉴드의 포도수확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1982년의 성공은 예외적인 여름과 수확기의 좋은 날씨 덕분이었다. 최고의 자연 조건이 만들어낸 역대급 빈티지로 기록되었는데, 보르도의 적포도 수확량이 전년 대비 40% 늘어나는 대 기록을 세웠다. 포도의 당분 수준도 1947년과 1961년에 맞먹을 정도로 매우 높게 나왔으며 와인 메이커들이 지하 셀러의 발효조에서 쨈 냄새처럼 농익은 향을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82년 빈티지는 보르도에서 보기 드문 숙성된 풍미와 질감을 보였고, 와인 전문가들은 이 빈티지를 '캘리포니아' 스타일이라 불렀다. 유례없이 좋았던 날씨 덕분에 보르도에서 나파 밸리 스타일의 와인이 나온 것이었고, 발효가 끝난 뒤 맛을 본 사람들은 마치 포트 와인을 마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한편 와인메이커들은 좋은 와인이긴 하지만 산도가 낮고 숙성 능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1982빈의 품질에 대해 와인 비평가들도 두 파로 나뉘었다. 당시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뉴욕의 비평가 2명은 보르도 1982빈을 혹평하며 절대 덤터기 쓰지 말라고 경고를 날린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무명에 가깝던 볼티모어의 로버트 파커는 ‘대박’ 빈티지를 확신하며 무조건 사야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83년에는 전년 빈티지 대비 25% 정도 오른 앙 프리메르 (En Primeur: 와인 선물거래) 가격으로 소박하게 시작되었지만 1984년에는 그 가격에서 두배 오른 금액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버트 파커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파커는 이 사건으로 인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와인 비평가가 되었다. 상술에 능한 영국과 미국의 와인 수입상들이 가장 많은 1982빈을 사들였고 큰 수익을 얻었다.

1982년의 놀라운 점은 일반 와인부터 크뤼 클라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보르도 와인들이 훌륭했다는 점이다. 극히 예외적인 해에만 일어나는 일인데, 1982빈 같은 쾌락주의적인 맛과 풍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보르도 와인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양조가문 로쉴드(Rothschild)는 원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되었는데, 로쉴드는 독일어로 Rothen Schild, 즉 ‘붉은 방패(Red Shield)’를 뜻하며 영어로 ‘로스차일드’로 불린다. 세계적인 금융 재벌인 로스차일드는 세계 정치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아주 대단한데, 18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전대업을 하던 이 가문은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때 큰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다섯 아들을 런던, 빈, 나폴리, 파리, 프랑크푸르트의 은행 지점장으로 파견하여 서유럽에서 금융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8대에 거쳐 250년간 세계 금융시장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오형제를 상징하는 다섯개의 화살을 와인의 라벨에서 볼 수 있는데,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고대 스키타이 왕이 남겼던 유언처럼 자식들에게 화목과 단합을 강조하며 남긴 유언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다섯 아들에게 화살을 하나씩 던져주고 꺾어보게 하자 모두들 쉽게 꺾어버렸지만 5개를 묶은 화살을 던져주자 아무도 그것을 꺾지 못했는데, 형제들간 단합의 중요성을 교훈으로 남긴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큰 돈을 벌게 되는데, 1815년 벨기에 워털루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운명을 건 전쟁이 벌어져 나폴레옹이 패배하게 되는데, 로스차일드는 정보를 미리 알아내어 마치 영국이 전쟁에 진 것처럼 영국 국채를 싼값에 내다 팔기 시작했고, 이에 패닉이 된 영국인들이 투매하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국채가 1/20가격으로 폭락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는 이를 시장에서 폭락한 국채를 조용히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 덕분에 오늘날 금융제국을 건설하는 종자돈을 마련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와인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으로, 당시 산업혁명과 정치적인 과도기에 졸부가 된 사람들은 고급문화와 사교의 상징이었던 와인과 와이너리에 주목했고, 유명 와이너리의 소유는 곧 기득권을 가진 귀족사회의 일원으로 대우받을 수 잇는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3대손인 나다니엘은 영국에서 살다가 프랑스로 이주해서 1853년에 샤토 브란 무똥(Chateau Brane Mouton)이라는 와이너리를 인수하여 자신의 이름을 넣은 샤토 무통 로쉴드를 세우게 되었다. 2년뒤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서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제도가 생기게 되어 인수한지 2년밖에 안된 샤토 무통 로쉴드에게 2등급이 주어졌다.

나다니엘이 샤토 무통 로쉴드를 세운지 15년뒤인 1868년에 그의 삼촌인 제임스 로쉴드 남작이 그랑크뤼 1등급인 샤토 라피트를 구입해서 샤토 라피트 로쉴드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사실 샤토 무똥 로칠드의 1등급 승격을 가장 방해한 것이 바로 라피트 로쉴드였다.

무통 로쉴드는 1870년 나다니엘이 죽고 증손자 때인 필리프 로쉴드(1902~1988)에 이르러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스무 살의 나이가 되던 1922년부터 운영 전권을 맡아 많은 변화와 혁신을 이루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와이너리에서의 직접 병입, 자체 라벨부착 판매, 매년 유명 화가의 그림을 라벨에 넣기 등의 변화를 주도했다.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쎄 제도가 생긴 이래 118년만인 1973년, 당시 자크 시라크 농무성 장관이 무똥 로쉴드를 1등급으로 승격시켜 주게 되는데, 이는 그냥 얻어진 영광이 아니고 무통 로쉴드의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의 결과라 하겠다. 1등급으로 승격한 1973년의 와인 라벨에는 그해에 타계한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바쿠스의 향연’ 이 실렸다.


김욱성은 경희대 국제경영학 박사출신으로, 삼성물산과 삼성인력개발원, 호텔신라에서 일하다가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어 프랑스 국제와인기구(OIV)와 Montpellier SupAgro에서 와인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25개국 400개 와이너리를 방문하였으며, 현재 '김박사의 와인랩' 인기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