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 와이너리의 입구. 포도밭에서 출토되는 화석을 모티프로 설계했다
데이 와이너리의 입구. 포도밭에서 출토되는 화석을 모티프로 설계했다

신상 와인을 마주할 때마다 필자는 탄생연도의 날씨를 기억해 내려고 애쓴다. 기억 창고를 뒤지다 보면 내가 감지한 것들과 사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 이러한 현실과 감정의 불일치는 일의 발생 시점부터 경과된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다.

3년 전 봄

신년 벽두부터 2020 빈티지들이 시중에 풀리고 있다. 끼안티 클라시코, 바르바레스코, 로에로,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등 의무 숙성기간이 30개월 미만인 갓난 와인들이다. 2020년이면 코로나 19발 일련의 봉쇄조치가 취해져 이탈리아가 옴짝달싹 못하던 해다. 코로나 세대 와인은 나의 단상을 2020년 봄 거리를 비추던 우리 집 유리창으로 데려간다. 유일한 세상구경은 일주일에 단 한번 허락된 마트 방문과 창문을 통해 텅 빈 유령도시를 바라보던 게 전부였던 그날들. 나의 심리적 출구였던 유리창이 보여주는 2020년 봄은 찬란했고 햇볕은 유난히 따가웠다.

3년 뒤 6월

본 칼럼에 참고할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필자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1차 봉쇄조치가 발효된 3월부터 6월 초반까지 북서 이탈리아 기상을 요약한 내용을 보던 중이었다. 3월과 4월은 비가 간간이 내렸으나 날씨는 대체로 화창했다. 6월 초에는 비가 200밀리미터나 왔고 지속적으로 궂은 날씨가 장기간 태양을 가려 평균 기온이 예년보다 4도나 낮았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내 기억의 편린 그 어디에도 비가 내리지도 춥지도 않았다. 6월은 사태가 어느 정도 호전됐다고 판단한 이탈리아 당국이 이동제한 고삐를 완화했고 주 경계 내에서 이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의 6월은 여전히 5월 햇볕이 비치고 있었다. 아마도 5월의 태양을 6월까지 간직하고 싶은 감정의 관성이 내 무의식을 압도했던 것 같다.

갑자기 와인 생산자들의 2020년 봄 창고를 채우고 있는 기억의 색깔이 궁금해진다. 봄철 농사 달력은 와인박람회나 와인협회가 주최하는 엉프리뫼 행사들로 빽빽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포도밭과 양조장을 떠도는 이들한테 봄철은 홍보와 영업활동에 더할 나위 없는 적기다. 이들의 주 일터가 들판인 까닭에 재택근무에 묶인 직장인들보다는 심리적 봉쇄는 상대적으로 가벼웠을 거다. 그러나 코로나 공황장애는 증상의 경중은 있을 지언 정 이를 피해 간 사람은 극소수였을 거다. 흔히들 와인은 90%가 포도밭에서 완성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2020년에 5%를 더 보태고 싶다. 팬데믹 증후군을 극복하려는 심리적 반동이 포도밭 근로 시간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미 각종 작황 평가표에서 상위를 점유했고 코로나 특수 상황까지 겹친 2020 빈티지는 전도유망한 퍼포먼스를 펼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토스카나 DOCG 와인 트렌드의 지표인 안테프리메 토스카네 시음회가 지난 2월에 열렸다. 몬테풀차노 와인협회는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2020년 산과 2019년 산 리제르바의 시판을 공식 발표했다. 이 자리에 선보였던 38여 종의 와인의 면모를 알아보도록 하자.

귀족적인 이탈리아 와인-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몬테풀차노 시청사 건물
몬테풀차노 시청사 건물

이탈리아 Docg에 등재된 와인의 이름을 둘러보면 그런 호칭을 갖게 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보통, 품종의 원산지나 와인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지명을 본 따 짖는다. 그러나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의 경우는 이 관례를 벗어난다. 뜻이 몬테풀차노(Montepulciano) 마을이 낳은 귀족적인(Nobile) 와인(Vino)으로 지명 뒤에 따라온 수식어(귀족적인)가 와인의 풍미를 추측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어원에서 우러나는 ‘귀족적인 품격’은 귀족이 애용하는 와인 또는 와인을 만든 본인이 귀족이라는 가정을 낳기도 했다. 비노 노빌레 단어가 등장한 시기는 불분명하나 이 표현을 기록한 최초의 문서는 1787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몬테풀차노의 관리, 조반 필리포 네리가 시에나 출장 후 증빙한 출장비 내역서 안에서 발견된다. 이를 볼 때 그 당시 비노 노빌레 표현이 일반적이 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몬테풀차노 지도
몬테풀차노 지도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DOCG (이하 비노 노빌레) 원산지 보호를 받는 지역은 몬테풀차노와 주변마을을 포함하는 몬테풀차노 코무네다. 코무네(Comune)는 중세 이탈리아의 행정단위로 현대 기초자치 단체의 근간을 이룬다. 행성 주위를 도는 위성처럼 중앙에 있는 몬테풀차노를 7 군데 마을이 둘러싸고 있다. 총면적이 1만 6천5백 헥타르며 이중 해발 2백50 ~6백 미터 구간에 조성된 1천3백 헥타르 밭이 DOCG등급에 선정됐다. DOCG밭을 제외한 5백50여 헥타르는 로쏘 디 몬테풀차노와 빈산토 디 몬테풀차노 DOC 지역에 지정됐다.

1966년 DOC 등급에 지정된 후 1980년에 Docg로 승급되었다. 1980년은 이탈리아 정부가 병목 라벨을 도입한 해로 라벨마다 숫자와 알파벳을 배열한 8자리 일련번호를 지정했는데 끝번호 1번 부터 50번까지는 비노 노빌레한테 배정했다고 한다. 별다른 기상이변이 없는 한 매년 출시하는 비노 노빌레와 비노 노빌레 셀레지오네가 있다. 와이너리 최소 의무 숙성기간을 24개월로 제한했고 출하는 수확연도를 기준으로 네 번째 해부터 가능하다. 셀레지오네는 수확 전 이중 선별한 상급포도를 사용한다. 리제르바는 작황이 최상인 해 만 맛볼 수 있는 한정판이다. 3년 의무숙성기간 중 병숙성 기간을 최소 6개월로 제한했고 라벨에 표시된 해로부터 5번째 해에 시판에 들어간다.

2010년에 개정된 규정은 주품종인 푸르뇰로 젠틸레(prugnolo gentile) 함량을 최소 70%로 제한했고 나머지 30%는 토스카나주 승인이 난 레드 품종만 혼합할 수 있게 했다. 산조베제는 이탈리아에서 안 나오는 곳이 없을 정도로 대중적이라 이탈리아의 국민품종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다 보니 고을마다 지칭하는 이름이 천차만별이다. 푸르뇰로 젠틸레는 몬테풀차노 지역 내에서만 통용되는 산조베제 동의어다. 이곳 풍토에 순응을 하다 보니 여타의 산조베제과 구별되는 스타일을 확립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단순화한 가정일지 모르겠지만 끼안티 클라시코와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의 중간쯤이라 할까. 끼안티 클라시코보다는 복합미가 짙으며 부르넬로 보다는 보디의 중후함과 엄격함이 덜 하다. 하지만 하이엔드 품질이 타깃인 그란 셀레지오네의 등장, 부르넬로가 질감을 우선하고 견고함 보다는 조화로운 타닌을 추구하는 추세라 앞의 가정이 꼭 맞는 건 아니다.

2018년과 2020년의 습한 봄과 여름이 일깨우는 걱정들

다시 2020 년으로 돌아가자. 몬테풀차노의 3 월에서 5월은 강수량이 희소했고 지속된 저온으로 인해 발아와 개화가 지체되었다. 6월 들어 비가 120mm 내렸고 중순부터 여름 기온(27~30도)을 회복해 8월 20일경에 포도는 착색을 마쳤다. 9월 20일을 전후해 내린 비는(165mm) 기온을 끌어내려 완숙 속도를 지연시켰다. 하지만 생산자들은 수확 타이밍에 묘미를 발휘했다. 당과 산도의 측정치가 적정 범위에 들고 폴리페놀 숙성기간과 겹치는 9월 15일에서 10월 7일에 수확을 마쳤다.

2018년은 강수량만 봤을 때 2020년과 비슷한 기후 패턴을 그렸다. 다만 비가 2월과 5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몰려(800 mm) 흙 속의 물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7월~ 8월에 심한 일교차로 인해 지표의 습도 증발 속도가 빨라지면서 부풀었던 포도 부피가 감소했다. 7월 23일부터 8월 16일 사이에 포도는 무사히 착색을 마쳤다. 이후에도 비가 간간이 내려 곰팡이 확산 위협이 잔존했으나 강도 높은 열매 선별 작업 덕분에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 해 모두 ‘잦은 여름 철(7~9월) 비’ 란 과제를 안고 있었다. 2020년 여름은 비가 시기적절 한 때 그쳐 포도는 적기에 완숙을 끝냈다. 반면 2018년은 비가 20일 간 소강상태에 머무는 사이 포도가 서둘러 완숙기를 종료했다.

시음 노트

2020년 비노 노빌레 (25종 시음)는 강렬한 산미, 견고한 타닌과 몰입도가 뛰어난 구조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체리, 자두, 라즈베리, 카시스 같은 레드 과일이 순수함을 발산한다. 어린 타닌이 혀에 닿을 순간 다소 거친 느낌을 남기나 산미와 미네랄의 조화로움이 날카로움을 보완한다. 2018년 빈티지 (12종)는 라즈베리, 자두, 장미, 체리, 스파이시의 싱싱함을 지속하고 있다. 산미가 예리하며 구조가 치밀한 짜임새를 보이나 유연한 식감도 지닌다. 타닌의 긴장감이나 임팩트가 약하나 여운 속에 귀족적인 감성이 배어있다.

2023년도 이목을 끄는 해다. 2년의 긴 가뭄 끝에 지난 5월 초부터 6월 중순에 걸쳐 비가 집중적으로 내렸다. 피에몬테주 만 같은 기간에 350mm의 비가 쏟아졌다. 포도는 건조한 여름에 익숙해 있다. 포도가 영양분을 농축하는 여름철에 비가 쏠리는 빈도가 증가한다면 향기의 종류, 타닌의 짜임새나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이 입게 될 타격이 걱정스럽다.

카테리나 데이가 제안하는 성악과 비노 노빌레의 마리화주

데이 와이너리의 오너 카테리나 데이
데이 와이너리의 오너 카테리나 데이

데이 와이너리(Cantine Dei)는 3세대에 걸쳐 비노 노빌레에 올인하고 있는 패밀리 와이너리다. 1세대인 아리브란도 데이가 세운 귀족풍 전통은 2세대가 축적한 크뤼 밭 기반의 전문성과 결합해 3세대에 이르러 차별되는 우아함으로 확립됐다. 반세기 넘게 데이의 스테디셀러를 구가하는 와인은 보쏘나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리제르바다. 아이콘답게 강렬함과 우아함을 겸비하고 있으며 작황의 변동이 심해도 귀족적 캐릭터를 한 번도 잃은 적이 없다. 오너인 카테리나는 원래 성악도였으나 아버지의 지속적인 설득에 꿈을 접고 와인계에 뛰어든 프리마돈나다.

데이 와이너리 숙성실은 카테리나의 음악 열정과 미적 취향이 낳은 보석이다. 설계에서 완공까지 8년 걸렸고 내부 벽은 트라베르티노 토스카나 대리석으로 장식했다. 실내 온도와 습도는 자가 지열 발전 장치가 조절한다. 입구의 달팽이 계단은 포도밭에서 출토되는 화석을 모티브로 설계했다. 입구 반대쪽은 정원과 연결되는데 이곳에 서면 그리스 원형극장 형태로 지은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카테리나는 미완성의 꿈을 이곳에서 실현한다고 한다. 그녀가 선곡한 노래와 마리화주 한 비노 노빌레 콘서트가 한 여름밤 극장에 메아리친다.

데이는 총 60헥타르의 포도밭을 소유하는데 다섯 군데로 구분해 밭의 미세환경 표현에 매진하고 있다. 보쏘나 밭은 해발 350~400미터에 정남과 남동을 향하며 수령은 20년 정도다. 자연효모 발효에 이어 30일 침용한 와인을 톤노(5백리터 오크) 숙성 18개월, 병숙성 18개월 순서로 완성했다.

비노 노벨레 디 몬테풀차노 Docg Riserva Bossona
비노 노벨레 디 몬테풀차노 Docg Riserva Bossona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Docg 리제르바 보쏘나 2018 빈티지

감초, 바이올렛, 자두, 체리의 다채로운 향이 매혹적이다. 바디를 이루는 타닌의 짜임새가 매끄러우며 생생한 산도는 음용감을 드높인다.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Docg 리제르바 보쏘나 2017 빈티지

흑자두, 체리 쨈 , 라즈베리, 아니스, 오리엔탈 스파이시, 말린 장미가 그윽하다. 감초, 민트, 타바코의 여운이 매혹적이다. 각을 세운 타닌 결이 미각을 긴장시키는 동시에 촘촘한 구조는 충만감을 준다.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Docg리제르바 보쏘나 2016 빈티지

말린 흑자두, 체리, 장미, 라벤더, 월계수잎, 감초, 카카오의 로맨틱한 향기가 솟구치다가 금속취가 잔향을 마무리한다. 타닌의 단단함과 산도의 경쾌함이 만난 구조는 적당한 보디감을 지니며 다채로운 풍미가 더해져 밸런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Docg 리제르바 보쏘나 2015 빈티지

달콤 농밀한 체리, 낙엽, 타바코, 버섯, 젖은 흙이 깊은 맛을 낸다. 붉은 과일을 깨문 듯한 풋과일의 감동이 전달된다. 힘 있는 풀보디, 잘 숙성한 타닌만이 지니는 매끄러운 기품을 지니고 있다.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차노 Docg 리제르바 보쏘나 - 3리터 제로보암 병에 숙성한 2001 빈티지

리큐르에 삭힌 체리, 타바코, 가죽, 흙자두, 감초, 계피, 민트, 삼나무등 우아한 향기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벨벳 같은 타닌 결과 응집된 힘이 뿜어내는 신비함, 산미는 변색되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전성기에 진입했으며 당분간 그 기간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 보여 줄 잠재력이 기대된다.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공인 소믈리에
국제 와인 품평회 심사원
이탈리아 와이너리 투어 운영
이탈리아 치즈 테이스터 협회(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1 레벨 와인 치즈 테이스터
랑게 와인 앰버서더
로에로 와인 저널리스트 협회가 주최하는 2022년 국제 와인 저널리스트에 선정
Certified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Columnist of Korean Wine Magazines
Wine Judge from International Wine Awards
Awarded as Best Foreign Journalist for Roero Wine Region
Langhe Wines Ambassador
Organizer of Winery Tour in Main Italian Wine Region
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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