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하게 가슴을 풀어헤친 가운을 입고 한주는 식탁에 앉았다. 한영은 에이프런을 목에 맨 차림으로 음식을 날라왔다. 이 집의 자랑 한우 숙성육. 25미리 컷으로 8주 이상 숙성시켰다. 거기에 눈개승마를 문경의 주담정 양조장 사장님이 주신 보리고추장에 무친 것, 그리고 직접 담근 된장에 표고를 메인으로 서너 가지 버섯을 넣고 끓인 버섯된장찌개다. 

이 정도가 한영이 생각하는 '간단히' 먹는 식사다.  

한주는 일손을 거드느라 밥을 퍼서 자리에 앉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한영도 에이프런을 벗고 식탁에 앉았다. 반소매의 헐렁한 티셔츠 속에서도 느껴지는 잔근육의 움직임이 싱그럽다. 

한영이 매끄러운 동작으로 술병을 따고 잔에 따랐다. 잔은 튤립형의 글랜케언. 위스키 잔으로 많이 쓰는데 한주와 한영은 이것을 메인 시음잔으로 쓴다. 와인잔도 좋지만 크고 관리도 손이 많이 가는 편이라서 시음용으로는 잘 쓰지 않는 편이다. 둘 다 데칼코마니 같이 잔을 바라보다 코를 대고, 다시 잔을 바라보다 코를 들이대고, 그러고는 한 모금을 마신다. 그 동작의 리듬이 정말 약속이나 한 듯이 맞아떨어진다.  

“어때?” 

“이 술은 꼭 가벼운 와인 같아요.” 

“응 그렇게 만든 술이야. 일부러 원주의 도수 자체를 낮추고, 이름도 외국어로 지었고 라벨도 컬러풀해. 와인병을 보는 것 같은데 맛도 어딘가 와인 스타일이 있어. 와인을 따라 한다는 기분, 그런 건 좀 반감도 느껴지지만 젊은 세대가 나름의 도전을 하는 것이라서 마음에 들어.” 

“신생 양조장인가요?” 

“어쩐 일인지 니혼슈 쪽에는 신생 양조장이란 건 거의 없는 것 같더군. 이 술이 나오는 아베슈죠(阿部酒造)는 200년이 넘은 양조장이야. 코시노 오토코야마(越乃男山)라는 술이 플래그십 모델인데, 이번 사케노진에서 젊은이들로만 구성된 팀이 나왔더군. 다른 곳은 다 나이 든 사장님들이 젊은 직원들을 지휘하는 시스템인데 여기는 젊은 사람들만 모여있는 데다가 병 디자인만 봐도 아 여긴 좀 다르구나 싶었지. 그래서 시음을 해보니 역시 감각 자체가 다른 술이더라.” 

“전통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군요. 무언가가 쌓인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 순간도 다 전통인데.” 

한영의 마지막 말에는 약간의 결기가 맺혀 있다. 쟝르와 관례에 얽매이지 않고 좋은 술을 만들려는 한영의 다양한 시도는 한 편으로는 ‘전통’에, 한편으로는 주세법령에 막혀서 좌절의 연속인 상태다. 한영의 눈썹 사이에 어두운 기운이 모이는 듯하다가 다시 확 밝아진다. 

“일단 술맛보다도 기분이 좋아요.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 만나보고 싶네요.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에요.” 

“음, 그래 일본도 전통 타령만 하다가는 뒤떨어지겠지.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희망은 있는 것 같다.” 

말없이 한 잔 씩을 더 따르고, 처음과 똑같이 테이스팅 모드로 한 모금씩 더 마시고, 그리고는 훌떡. 그리고는 둘이 눈이 맞아 웃었다.  

“이 술은 몇 점을 주시겠어요?” 

“음, 일단 술 자체의 기본기는 좋긴 한데, 자기 스타일이 있는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와인과 사케의 중간에서 아직 자리 못 잡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향, 지금은 가벼운 방향이지만 곡주에는 과실주가 따르기 힘든 없는 감칠맛과 입체감이 있지…. 지금 상태로는 8점 정도일까. 하지만 장기숙성을 하면 분명히 좋아질 거야.” 

“8점… 정도군요. 무난히 여러가지 음식에도 어울리고, 차게 마셔도 좋고 상온 정도에서 마셔도 좋을 것 같고, 두루두루 쓰임새가 좋겠네요.” 

한영은 그렇게 말하며 각자에게 한 잔씩을 더 따랐다.  

류한주, 키가 크고 두툼한 가슴에 눈매가 날카로운 서른다섯의 수려함. 조한영, 보통 키에 날렵한 체형이지만 양조장 일로 다져진 섬세한 근육, 그리고 눈 같이 하얀 피부의 스믈여섯의 반짝임.  


용어설명 : 니혼슈의 단위


일본 사케의 기본 단위는 고(合), 쇼(升), 고쿠(石)이다.  1고는 이자카야에서 보는 나무잔 한 잔의 양으로 180ml에 해당하고, 10 고가 1 쇼로 1.8L, 100 쇼가 1 고쿠로 180L이다. 원래 사케는 잇쇼빙(一升甁), 즉 1.8L 병이 기본이고 욘 고빙(4合甁)은 작은 병으로 친다.

니혼슈는 대부분 살균주이기 때문에 큰 병을 가지고 잔술을 팔며 오래 열어두어도 되지만 나마슈(生酒)의 경우에는 병을 개봉하면 빨리 소비를 하는 것이 좋아서 720ml 작은 병을 주로 쓰는 경향이 있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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