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잘 잤다는 느낌과 함께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홍천의 맑은 공기는 자체로 힐링포션 같다. 가까운 일본에 다녀왔을 뿐이지만 며칠간 계속 술을 마신 것도 그렇고, 여독이 없지 않을 것 같은데도 이렇게나 가뿐하다. 

오늘은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날이다. 특산물 담당의 양형무 계장, 한주와는 말이 통하는 사이다. 지난해 한주가 무작정 지역특산물을 담당하는 담당자를 찾아서 밀고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양형무 계장이 담당하는 지역특산물이라는 것은 인삼이나 사과, 옥수수 같은 것이었고  홍천에 프리미엄급의 한주를 생산하는 양조장이 여남은 개나 되는 것을 비롯해서 전체적으로 열 개의 양조장이 홍천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사실은 양계장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막무가내식으로 밀고 들어와 뭔가를 설득하려는 한주와 말다툼 비슷하게 열을 올린 지가 몇 번이 되고, 그러다 보니 한주가 쓴 ‘한주 수도 홍천의 청사진’이란 책도 읽어보고 하다 보니 이제 현황 파악도 되고 한주의 정열이 이해가 갔다.

한주의 입장에서도 양계장과 처음에는 껄끄럽게 시작했지만 돌아보면 그건 한주가 미숙한 탓도 컸다. 도대체가 남들이 자기 생각을 알아줄 것이라고, 아니 관심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전혀 근거 없는 전제라는 것을 새록새록 깨닫는 것이 사업을 시작한 이 몇 년 새의 인생이다.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한주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져만 가는 것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한주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아니 뭐라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것도 젊고 일 할 만한 사람이.” 

“아 그걸 누가 몰라요? 뭘 하든 그건 당연한 얘기지.” 

“아니, 그럼 그런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이렇게 빈손으로, 맨땅에 오라면 누가 오겠어요?” 

양계장이라고 무슨 소린지를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말단 공무원으로서 예산과 지침이 없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러니까 일단 농업경영체 등록만 하면 군에서 만들어줄 수 있는 사업이 있긴 해요. 먼저 농업경영체 등록부터 하고…” 

“아 참, 답답하시긴. 외지에서 오는 청년이 자경 하는 땅 300평이 어디 있어요? 그건 노후대책 다 세워두고 여유 있는 은퇴자들한테나 할 소리지. 결국 젊은 사람 없다 없다 하면서 그나마 있는 예산들은 노인들이 다 쓰고 있는데 누가 이 시골에 와서 살겠다 그러겠요? 젊은이들은 다 빠져나가고 은퇴자들만 잔뜩 들어와서 고령화 속도만 빨라지는 게 홍천의 현실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농산물이 없어서 문제예요? 생산이 돼도 못 파는 게 문제지. 농민이 무슨 슈퍼맨이에요? 6차 산업 한다지만 농사는 농사대로 다 짓고 그거 또 가공하고, 마케팅하고, 관광산업까지 다 하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한주 씨 말도 이해는 가지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농업경영체 등록 안 되면 홍천뿐 아니라 전국 어디 가도 다 비슷해요. 농업경영체 등록만 해오면 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요.” 

“휴…, 결국 여기서 막히는군요. 서울에서는 청년이라면 신청만 해도 몇 천 만원은 창업지원을 해주는데….”

한주가 개인적으로 자금이 필요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홍천에서 한영과 단둘이 뭘 해보려니 손도, 마음도 부족해서 사람을 좀 데려오고 싶은데 워낙 바닥이 척박하다. 캘리포니아 같은 곳은 양조학과부터 시작해서 양조장 일자리도 많고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서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투자도 몰린다. 일단 생산이 되면 국내 시장도 크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으로 관세며 이런저런 장벽을 다 제거해서 수출도 도와준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것도 다 인프라의 문제다. 미국 정도는 바라지도 않지만, 이 나라의 농업정책은 의욕있는 청년들을 농촌에서 더 몰아내는 방향인 것만 같다.

한주도 물을 한 모금, 아니 한 잔을 확 들이켜고 숨을 돌렸다. 양계장 선에서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다는 건 안다. 아니, 이건 군수나 도지사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 편으로는 폐농을 권장하고, 다른 한 편으론 농사를 안 지으면 아무리 지역에 살아도 아무것도 안 해주겠다는 모순된 농업 정책이다. 농업정책의 빈틈을 이용해서 이것저것 빼먹을 것 다 빼먹는 도시의 부재지주들에 대한 경계와, 생산해봐야 팔리지도 않고 좀 팔릴 만하면 뭐든 다 수입해서 값을 떨어뜨리는 경제정책에 대한 대응이 기묘하게 뒤틀린 결과이다.

이런 걸 경제학이라 부른다지. 그 경제학이란 건 이런 지방을 위한 경제학은 아니다. 

한주는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는 나라다. 이런 건 촛불을 들고 대통령을 갈아도 바뀌지가 않는다.  

“계장님, 언성 높여서 죄송해요.” 

“아녜요 한주 씨. 나도 한주 씨 못지않게 답답해요. 내 힘이 안 닿아서 어쩔 수가 없지만, 천천히 포기하지 말고 방법을 마련해 봅시다.” 

한주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양계장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렇다. 포기하지 말고 찬찬히.

인생이란 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예상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나이는 되었다. 지금 당장 길이 전혀 안 보여도 기죽을 필요도 없고 당장 승승장구한데도 그렇게 길게 가라는 보장도 없다. 깊은숨을 들이쉬고, 다시 한번 쓸 데 없이 열을 올렸다 생각에 이불킥이라도 하는 마음이 되면서 한주는 차에 올랐다. 레인지로버를 되도록 급히 몰아 바다로 달린다.  44번 국도, 미시령 힐링가도를 타고 한 시간 정도면 속초에 도착한다. 오늘은 속초에서 바다를 보며 답답한 마음을 풀어볼 심산이다.

*농업정책은 서서히 바뀌어가서 요즘은 청년들을 위한 지원이 조금 늘기는 했다. 지자체에서는 청년인구를 유입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농민이 아니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폭은 매우 좁은 편이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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