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엔 그동안 별 일은 없었고?” 

며칠 안 되는 시간이지만 비웠다가 돌아오니 역시 궁금한 것이 많아지는 한주다. 

“눈이 좀 온 것 말곤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이제 눈이 녹기 시작해서 물이 잘 흐르네요.”

3월이면 다른 곳은 봄색이 완연하지만 이곳 홍천의 산골은 아직 계곡에 물보다 얼음이 많을 때다.

“수질 검사받을 때 됐지?” 
“네 이달 말에 다시 받아야 해요.” 

사실 여기는 양조장이기도 하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상태는 아니지만 일단 면허는 받아 두었다. 현재는 상품을 출시하기 위해서 연구개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2~3년, 아니 필요하다면 더 긴 시간이라도 잡고 최고의 술을 만들어보려는 두 청년이다.  

‘최고의 술이란 무엇인가?’ 

최고의 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얻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단, 그 질문이 무엇인지를 정의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제시된 ‘전통주’는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게 나쁘다거나 부족하다기보다는, 둘은 이제까지 세상에 없던 것들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 이제까지 아무도 올라보지 못한 경지에 올라보고 싶은 것이 두 청년의 패기가 달려가는 방향이다.

그래서 말인데, 솔직히 말하면 전통주에 나쁘거나 부족한 게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전통주는 ‘전통’이라는 것에 갇혀서 정체되고 낡아가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을 소개할 때 이런 질문을 하길 좋아한다.

“전통주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세요?” 

대답은 대개 비슷하다. 어두운 장소, 한지로 바른 벽에 ‘누구누구 왔다감’, ‘사랑과 우정이 영원하길’ 등의 낙서, 표주박 형의 바가지(?)로 뜨는 동동주,…. 한마디로 70년대부터 이어지는 민속주점의 이미지인데, 이 이미지가 2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참 일관되고도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다른 부분에서는 이해관계고 문화감성이고 무자비하게 충돌하는 이 나라의 아버지와 자식 세대가 이렇게 정연하게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분야도 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마디로 정체, 그것이 전통주의 정체성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세상의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좋은 술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영이 늘 얘기하듯이, '쌓이면 전통이고 따라서 이 순간도 쌓일 가치가 있으면 전통'이다. 그런데 그런 가치란 것이, 꼭 ‘우리 것’만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참고하고 배우고, 또 그들도 우리로부터 배우고 따라 하는, 그런 과정이 문화라는 것이 아닌가. 한주에는 한주의 독자적이고 특출난 장점이 있듯이 외국의 다른 술에도 다 좋은 점이 있는데 굳이 우리 것이니 좋다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하지만 ‘전통주’ 업계는 유독 그런 아집과 견강부회가 심한 곳이라고 느끼는 것은 한주와 한영뿐 아니라 이 업계에 발을 담근 젊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바였다.

좋은 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정의되지 않은 상황. 한마디로 ‘난세’라고 불러도 이상은 없겠다. 이 난세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평정이 시작될 성격의 시대인 것이다.

한주는 남들 모르게 낯을 심하게 가린다. 레스토랑 운영을 하며 서비스 응대를 많이 하다 보니 일종의 '페르소나'가 생겨서 손님 응대라면 엄청나게 프로페셔널하다. 그래서 남들은 눈치 못 채지만 사실 사람 사귀는 것에 스트레스가 심한 편인 한주다. 어디 강연이라도 할라치면 전날 밤은 알 수 없는 스트레스에 뜬눈으로 새기 일쑤다. 한영은 그런 한주의 성향을 알기에 은근 장난기가 동한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사람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형도 돈 좀 버시게.” 

한주는 한영의 장난기가 밉지는 않지만 말꼬리 잡고 받아치기엔 이미 매일 사람들이 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져서 한동안 대답을 못하다가 간신히 한 마디 뱉어놓는다. 목소리가 낮아지다가 떨리기 직전이다. 

“내가 손님을 많이 받아 돈 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투어 오퍼레이터가 되어서 양조장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한주의 목소리가 농담이 아니게 진지하기도 하고, 놀린 것이 슬긋 미안해져서 한영도 농담으로 받아칠 수가 없어 그저 술잔을 채웠다. 이제 밤은 이슥해졌고 두 청년 다 볼이 발그레하다. 말수가 적어지고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혹은 어딘가 높은 곳에 시선을 두거나 한다. 그 사이 한주의 핸드폰에서 메신저가 울린다.  

치에다. 


용어해설 : 나파벨리, 스페이사이드, 니가타


각각 캘리포니아 와인, 스카치 위스키, 니혼슈를 대표하는 지역의 이름들. 생산시설(양조장, 증류주)만 많은 것이 아니라 투어, 교육, 마케팅, 관광, 금융에 이르는 인프라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백웅재
강릉에서 글짓고 밥짓는 백웅재 작가는 문명개화한 세상을 꿈꾸며 서울, 부산 등지의 한주클럽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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