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 종종 ‘인생 여행', '인생 와인'이라는 말을 꺼내곤 한다. 나에게 '인생 영화'를 하나 꼽으라면 주저 없이 '미드나잇 인 파리'다. 매일 밤, 낭만과 예술이 흐드러진 파리에서 1920년대의 황금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그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 깊숙한 곳을 간지럽힌다.

그런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우리도 여행을 하다 보면 문득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올 초 프랑스 알자스 여행이 바로 그랬다.

샤블리에서 따뜻한 날씨와 추억을 뒤로하고 알자스의 아름다운 마을 콜마르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환상적이었고 지붕 위로 소복이 쌓인 눈, 굴뚝 사이로 퍼지는 연기 그리고 한없이 고요한 거리의 정적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알자스 콜마르 & 눈 내린 포도밭 (사진=마현수)
알자스 콜마르 & 눈 내린 포도밭 (사진=마현수)

눈 덮인 포도밭을 따라 20분쯤 달려 트림바흐(Domaine Trimbach)가 위치한 히보빌레(Ribeauvillé) 마을에 도착했다. 무거운 눈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트림바흐의 오래된 석조 건물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고풍스러웠고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채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듯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트림바흐 와이너리 전경 (사진=마현수)
트림바흐 와이너리 전경 (사진=마현수)

이날 특별하게도 장 트림바흐(Jean Trimbach)씨가 직접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담담하고 차분한 눈빛의 그에게서 느낀 것은 단순한 '와인 메이커'가 아닌 한 가문의 시간과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감이었다. 우리는 먼저 테이스팅 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월이 깃든 나무들로 둘러싸인 이곳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스며들어 있었고 그 공기조차도 오랜 시간 숙성된 듯 진중함이 감돌았다.

트림바흐 테이스팅 룸 (사진=마현수)
트림바흐 테이스팅 룸 (사진=마현수)

트림바흐의 와인은 각각의 개성을 지닌 5가지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기본이자 절대 놓칠 수 없는 클래식(Classic), 엄격한 포도밭 선별을 통해 만들어진 리저브(Réserve), 더 집중도 있는 리저브 퍼스널(Réserve Personnelle) 마지막으로 늦 수확(Vendanges Tardives)과 엄선된 귀부 포도로 만드는(Sélections de Grains Nobles) 와인으로 나뉜다.

트림바흐 와인들 (사진=마현수)
트림바흐 와인들 (사진=마현수)

대부분의 와인이 리슬링 중심이었지만, 게뷔르츠트라미너, 피노 그리, 피노 누아, 피노 블랑, 실바너, 뮈스카 등 다양한 품종들을 테이스팅하면서 알자스 그랑크뤼의 떼루아와 각 품종이 지닌 고유한 개성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날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와인은 단연 Clos Sainte Hune 이었다.


Clos Sainte Hune 설명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이 한 번쯤 테이스팅 해보길 꿈꾸는 단 하나의 리슬링 와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Clos Sainte Hune이다." -세르두 듑스 (Serge Dubs) 1989년 월드 베스트 소믈리에

훈아비르(Hunawihr)마을에 위치한 총 26.1ha 규모의 그랑 크뤼 로사커(Rosacker) 포도밭 중심에는 특별한 밭이 있다. 단 1.67ha에 불과한 끌로 생 띈(Clos Saint Hune)이다. 남향 및 남동향의 중간 경사면에 마치 원형극장(Circus)처럼 둘러싸여 있어 거센 바람으로부터 보호받고, 풍부한 석회질 토양은 포도나무에 충분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한다. 이러한 자연조건 덕분에 뛰어난 복합미와 산미를 갖춘 와인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오래된 전설에 따르면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훈아비르(Hunawihr)의 왕비였던 훈아(Huna)는 마을 분수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이 전설의 이야기는 세월이 흐른 뒤 오늘날 알자스에서 가장 신비로운 포도밭 중 하나인 끌로 생 띈(Clos Sainte Hune)으로 불리고 있다.

도멘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와인 라벨은 1919년 빈티지였고 정확히 100년이 흐른 2019년 이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의미를 담은 100e Anniversaire 와인을 선보였다. 운 좋게도 2019년 빈티지와 2018년 빈티지를 비교 테이스팅 할 수 있었다.

장 트림바흐 끌로 생 띈(Clos Sainte Hune) (사진=마현수)
장 트림바흐 끌로 생 띈(Clos Sainte Hune) (사진=마현수)

-트림바흐 끌로 쌩 띈 2018 (Trimbach Riesling Clos Sainte Hune)

잔에 가까이 대는 순간 아카시아와 엘더플라워등 화려한 꽃향기가 피어오르고 잘 익은 레몬, 복숭아, 꿀에 절인 생강 그리고 은은한 페트롤 향이 조화를 이루었다. 입안에서는 직선적인 산도가 더해져 긴 여운을 남겼다.

-트림바흐 끌로 쌩 띈 2019 (Trimbach Riesling Clos Sainte Hune)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빈티지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수많은 화사한 꽃향기와 우아한 페트롤 그리고 칼날처럼 예리한 산도가 어우러져 지금 이 순간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앞으로 최소 20년 이상 숙성이 됐을 때 달라진 모습이 궁금해졌다.

테이스팅 후 장 트림바흐씨와 함께 와인이 숙성 중인 꺄브로 향했다. 트림바흐의 모든 와인들은 4대의 공기식 압착기(Pneumatic press)를 사용해 천천히 섬세하게 압착된다. 이후 자연 중력에 따라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로 내려가며 피노누아를 제외하고는 말로락틱 발효 (MLF)는 진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오크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통의 앞면에는 마치 우리나라의 해태처럼 수호신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어 신비로움과 함께 경외심이 느껴졌다. 클레식 와인들은 신선한 과실미를 살리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에서 발효와 숙성을 거치며 떼루아의 개성이 뚜렷한 그랑크뤼 와인들은 푸드르 (Foudre)에서 천천히 숙성된다고 한다.

와인이 숙성 중인 푸드르(Foudre) (사진=마현수)
와인이 숙성 중인 푸드르(Foudre) (사진=마현수)

투어를 마친 후, 오너인 장 트림바흐는 Clos Sainte Hune 포도밭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땅은 오래 기다려야 비로소 와인을 허락해 줍니다. 인내심 없이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말은 단지 트림바흐의 철학을 넘어, 우리의 삶에도 깊은 울림을 주는 조언처럼 들렸다.

장 트림바흐(Jean Trimbach) (사진=마현수)
장 트림바흐(Jean Trimbach) (사진=마현수)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마지막 장면처럼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오늘 저녁은 프랑스 알자스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마현수 소믈리에

국제 와인 전문가 인증과정 WSET Level 3 취득
Court of Master Sommelier, Certified Sommelier 취득 
(현) 스와니예 헤드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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