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프랑코 스승님을 처음 본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13년 전, 필자는 눈을 반짝이며 양조학 수업에 진심인 예비 소믈리에들 사이에 있었다. 우리의 시선은 종이칠판에 발효탱크와 생소한 효모이름을 써 내려가며 설명에 몰두하는 스승님한테 쏟아지고 있었다. 종이칠판은 마치 두툼한 흰 종이 묶음을 고정장치로 나무 보드에 매달아 놓은 이젤과 흡사했다. 강의실 가운데는 어떠한 멀티미디어 이미지라도 비춰 줄 태세의 빔 프로젝터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스승님 시간만은 고물 취급받았다. 스승님은 수업시간과 종이 칠판 두께를 정확히 계산하고 계셨다. 마지막 한 장을 다 채울 즈음 수업이 끝났다.
7 년 뒤에 스승님을 다시 만났다. 한 와인 품평회였는데 심사 당일 날 가니 스승님이 내가 속한 조의 팀장 자리에 앉아계셨다. 스승과 제자의 강의실 밖 첫 만남이라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종이칠판을 아직도 애용하시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심사원 초보시절이었고 옛 스승 앞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과도하게 긴장하다 보니 궁금증을 해소할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대회 마지막 날 스승님은 와이너리를 개장했는데 시간 되면 한 번 오라고 당부하셨다.
스승님이 와인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니, 어찌 보면 양조가의 당연한 수순 같기도 했고 평생 남의 와인 만드는 데 잔뼈가 굵은 자가 자신을 위해 만든 와인의 맛은 어떨까 궁금했다. 스승님의 성명은 잔프랑코 코르데로로 이탈리아 와인명문학교 알바 양조학교를 수료했다. 이후 바롤로, 바르바레스코, 바르베라 다스티같은 토착품종 정체성과 양조 전통이 집약된 산지에 거점을 둔 와이너리를 두루 거치면서 양조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자신만의 양조 스타일을 구축했다.
1970~1980년 대 남부 피에몬테 와인이 근대적 대량생산 기반에서 탈퇴하여 고품질 소량생산의 양조모델로 전환하는 시기에 이를 주도한 생산자의 수석 와인메이커로 활약했다. 대표적인 생산자를 꼽자면 G.D 바이라, 카스텔로 디 네이베, 콘테르노 판티노, 디에고 콘테르노, 코르데로 디 몬테제몰로 를 둘 수 있겠다. DOC 와 DOCG 등급 와인 시음 패널을 연임하고 있으며 아르네이스, 루케같은 멸종위기 토착품종 복원 및 상업화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핵심멤버 중 하나다. 1989년은 양조가 직함 외에도 코르데로 컨설턴트(Cordero Consulenze) 연구소 대표직이 추가된다. 스승님이 반평생 확고한 입지를 다져온 화학성분 검사 및 분석, 양조 기술 지원, 토양별 품종 맞춤 서비스, 품종 분석, 하이엔드 양조 장비 지원, 각종 와인규정 컨설팅, 와인 품질 심사 및 인증이 전문이다. 현재 컨설팅을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회원 와이너리가 이탈리아 5개 주에 170여 군데에 달한다.

와인오너 와인 메이커 경력 6년차, 가브리엘레의 솔직한 와인
스승님이 알려준 주소를 도로안내 앱에 입력하니 로에로 프리오카(Roero Priocca) 마을 어귀까지 데려다주었다. 로에로는 피에몬테주 알바 시(Alba) 북쪽 경계를 굽이도는 타나로 강 북쪽에 자리 잡은 구릉지대다. 타나로 강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북서쪽으로 20분 이동하면 프리오카에 도달한다. 와인만 본다면 로에로는 남쪽에 위치한 랑게와 비슷한 품종다양성을 공유하지만 모래토양과 온후한 기온을 살린 독자적인 풍미를 개척해 왔다. 담백함과 산미가 어우러진 미네랄이 시너지를 이루어 원만한 목 넘김과 직관적이며 솔직한 아로마로 자존감을 높이고 있다.
정문 기둥에 걸린 코르데로 가브리엘레 ( Az. Agr. Cordero Gabriele) 명판을 배경으로 스승님이 젊은 친구들을 대동하고 마중 나오셨다. 젊은이들은 스승님의 자녀인 세레나와 가브리엘레 남매였다. 잠시 교통정리를 하자면 명판에 적힌 가브리엘레가 아들이고 와이너리의 실질적 주인이 아들인 거였다. 순간 코르데로가 남자들의 화려한 와인입성이 아닌가 싶었다.
스승님과 두 자녀가 와인을 만들자고 의지를 투합한 때는 2016년이었다. 몇 대를 이어 내려오는 포도밭 8헥타르와 선친이 거주하던 농가가 있었고 지하실에는 작지만 양조장비도 마련돼있었다. 남매는 아버지의 판박이처럼 양조 과정을 마친 뒤 유수의 양조가 밑에서 수습기간까지 마쳤다. 장녀 세레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유학을 마친 뒤 아버지 연구소에서 컨설턴트 팀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니 코르데로 와이너리는 구성원이 가족에다 동창이며 동료이기도 한 세 명이 한 배를 탄 셈이다. 물론 가브리엘레가 양조장과 밭 일을 도맡아 하지만 아버지와 누나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손을 보탠다. 다들 주관이 확고해서 중요한 결정(수확시기, 산소투여시기)을 앞에 두고 의견충돌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세레나한테 충돌 해소법을 물어봤더니 다른 의견들을 수렴하고 조정해서 최종결정을 내리는 건 아버지라고 귀띔해줬다.
그러나 가브리엘레와 세레나의 와인들은 그들만의 색깔이 진하다. 그 속에 와인 비평가들의 입이나 펜을 통해서 알려진 아버지의 관록과 연륜은 조언으로만 남는다. 화려한 아버지의 후광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다. 남매의 와인은 놀랍도록 순수하고 품종 아로마 표현에 충실하고 기교의 흔적이 없다. 와인 라벨은 가브리엘레 어린 시절 추억을 담았으며 천진난만한 눈에 비친 이미지를 응축한 동화세계다.

로에로 아르네이스 인나브Roero Arneis INNAV 2021 와인 라벨은 수확한 아르네이스를 손자 가브리엘레와 할아버지가 나르는 순간을 하얀 배경에 옮겼다. 인나브(INNAV)를 거꾸로 읽으면 반니VANNI인데 할아버지 이름이다. 양조된 곳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밭의 모래와 철 성분의 조화가 아삭한 산미와 향기로운 냄새의 비밀이다. 크리스털 같은 산도는 과육이 당분을 과도하게 쌓아 놓기 직전에 거둬들인 타이밍의 산물이다. 수확직후 저온실로 옮겨 하룻밤 놔두어 아로마분자를 활성시키고 저온침용과 압착,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내 저온 발효 순서로 완성했다. 파인애플, 복숭아, 살구, 레몬, 캐모마일, 타임 허브 향의 조합은 달콤함과 싱그러움을 불러온다. 쌉쌀한 아몬드 여운과 미네랄 힌트가 입안에 감돌 때 마치 날개를 단 여신이 혀에 사뿐히 내려앉은 느낌이다.

바르베라 달바Barbera d’Alba 2021는 가을의 바르베라 밭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바르베라 밭을 휘감아 도는 산길과 두 그루의 단풍나무, 모퉁이의 여우 구도는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을 암시한다. 바르베라 품종은 수확타이밍이 중요한데 산도가 약간 높다 싶을 때가 적기다. 알코올 발효직전까지 산미를 보존하기 위해 화이트 품종처럼 다룬다. 하룻밤 냉장고에 보관해 열을 식히고 압착한 포도를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로 보내 발효한다. 발효 시 산소주입 타이밍과 양이 중요한데 미량의 산소 투여는 타닌분자의 결합을 도와 부드러운 결과 매혹적인 붉은빛을 돌게 한다. 체리, 자두, 라즈베리, 크랜베리 같은 상큼한 향기에 이어 농익은 딸기향이 감각을 일깨운다. 붉은빛 과즙 속에 감도는 산뜻한 산미, 순하면서도 생동감 지닌 타닌은 바르베라의 젊음을 발산한다.

랑게 네비올로 푸스끼아 Langhe Nebbiolo Fuschia 2021 와인이름 푸스끼아 (Fuschia) 는 안개를 뜻하는 방언이다. 네비올로란 표준어와 방언을 반복하여 만든 이가 자신의 영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었다는 우회적 표현이 아닐까. 라벨 속 건물은 와이너리 정문 우측에 장병처럼 서 있는 산미켈레 예배당을 단순화한 선으로 표현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림의 시점인 소년기까지 죽 지켜보았을 동화 속 단상을 어른 가브리엘레가 꺼내 보였다. 네비올로는 모든 양조가의 궁극점이다. 스승님 또한 네비올로를 다루는 능숙함이 양조가의 자질로 통하는 세계에서 자신을 증명해 왔다.
푸스끼아는 품종에 내제 한 고유성을 끄집어내는 수단으로 와인 기본기에 충실했다. 10% 의 네비올로를 가려내 보졸레 누보의 화사한 과일과 꽃 부케를 얻는데 일반화된 탄산 침용 발효를 적용했다. 이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발효와 숙성, 6개월 병숙성의 단순 룰을 따랐다. 네비올로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포도농사를 잘 짓지 못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체리, 오렌지 필, 라즈베리, 유칼립투스향이 스쳐갔다가 다시 밀려오길 반복한다. 목에 유연하게 넘어가는 질감, 타닌의 촉이 미각을 자극하지만 과즙이 그위를 살포시 덮어주는 절묘한 맛이 있다. 로에로의 모래토양 만이 펼칠 수 있는 맛의 세계다.
작년에 가브리엘레는 그의 회심작 로에로 첫 빈티지를 내놨다. 로에로는 네비올로 와인으로 오크 숙성의무가 없는 랑게 네비올로와 달리 오크숙성이 필수고 법정 최하 숙성기간이 20개월이다. 2백 병 내외의 2021 빈티지였는데 섬세한 표현력이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수준이란 호평을 얻고 있다. 거기다 2024년 22회 국제 와인시티 품평회의 네비올로 부문과 종합부문에서 동시 우승해 골드메달 2관왕에 올랐다. 오너 와인 메이커 경력 6년 차, 커리어의 정점에 오른 양조가 아버지를 둔 아들이 홀로 걸어 갈 와인 발자국이 궁금해진다.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공인 소믈리에
국제 와인 품평회 심사원
이탈리아 와이너리 투어 운영
이탈리아 치즈 테이스터 협회(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1 레벨 와인 치즈 테이스터
랑게 와인 앰버서더
로에로 와인 저널리스트 협회가 주최하는 2022년 국제 와인 저널리스트에 선정
Certified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Columnist of Korean Wine Magazines
Wine Judge from International Wine Awards
Awarded as Best Foreign Journalist for Roero Wine RegionLanghe Wines AmbassadorOrganizer of Winery Tour in Main Italian Wine Region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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