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엘레 형제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몇 년 전에 두어 군데 바롤로 밭을 막 인수한 터였고 1990년대 바롤로 시장판도를 저울질한 결과 이들 손에는 두 가지 패가 쥐어졌다. 첫 번째 패는 토질별로 밭을 구획하고 이를 와인 라벨에 당당히 표기하는 것이다. 두 번째 패는 밭의 개별성보다는 시각을 전체로 넓혀 밭 별로 장점들만 한 데로 모으는 후광효과를 노리는 거다.
전자로 할 경우 그 누구도 실행한 적 없는 전인미답이라 위험이 따른다. 만일 형제가 만든 바롤로가 운 좋게 와인샵에 진열된다 해도 명성이 자자한 밭에 가려 소비자의 눈에 띄지 않을 확률이 높다. 후자는 클래식 바롤로로 분류되어 바롤로란 브랜드의 날개 밑에 들어가는 거다. 둘 다 장단점이 있지만 형제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로 했다.
잠시 바롤로 생산자가 밭을 구입하거나 임대하면 이를 어떻게 최적화하는지 알아보자. 보통 방위(남, 동, 서), 경사도, 해발 제한(170~540미터) 같은 기본 조건을 충족한 밭*은 170여 개가 있고 MGA (크뤼, 싱글빈야드)로 지정되어 관리된다. 이 조건을 벗어나면 랑게 네비올로, 돌체토 달바, 바르베라 달바, 랑게 비앙코나 랑게 로쏘 같은 DOC급 와인에 활용된다. MGA 밭 전체 넓이는 2천 1백여 헥타르고 땅 주인은 각자의 밭을 요리해 3종류의 바롤로 메뉴를 내놓는다. 여러 밭을 혼합해 클래식 바롤로로 만들지, 아니면 한 밭으로 MGA바롤로를 만들지는 밭주인 소관이다. 그리고 밭의 해체나 결합과는 무관하게 리제르바 바롤로를 내놓을 수 있다. 리제르바는 작황이 특출 나게 좋은 해와 밭 조건이 일치할 때만 나오는 바롤로의 최고봉이다.
* 코무네 바롤로(Barolo Del Comune)를 포함시켜 181군데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빌리지 바롤로다. 코무네 뜻은 지방자치단체로 그 유래는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찾는다. 그러니깐 바롤로 지역은 코무네란 11개의 소지역을 합쳐 놓은 생산단위다. 코무네 바롤로는 단일 코무네 안에 지정된 밭을 혼합한 개념이며 클래식 바롤로는 밭 범위를 11군데 코무네로 확장한 것이다. 밭 소재가 라모라 코무네로 제한되면 바롤로 델 코무네 디 라모라, 몬포르테 달바 코무네로 한정되면 바롤로 델 코무네 디 몬포르테 달바다.
한편 밭끼리 편차도 심하다. 인지도도 천차만별이고 밭을 소유한 와이너리 수도 다르고, 밭 거래가도 하늘과 땅 차이다. 카누비, 부르나테, 빌레로, 로케 델 아눈지아타는 영빈티지라도 100유로 호가한다. 밭의 명성은 와인 가격, 품질, 개인의 선호도 같은 변수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나 바롤로 MGA지도를 작성한 알레산드로 마스나게티에 따르면 ‘밭 소유자가 다 수이고 그럴 경우 동일한 라벨을 가진 바롤로가 많아지고 결국 소비자 눈에 잘 띄게 마련이다. 또한 이런 밭들은 빈티지를 건너뛰지 않고 꾸준히 바롤로를 내놓고 있다’라고 밝혔다.
빙산 MGA바롤로를 아시나요?
170개 중 한 번도 라벨에 표기된 적이 없는 빙산 MGA가 있다. 대략 30여 개가 있는데 클래식 바롤로로 만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패기 넘치고 확신에 찬 몽상가를 만나서 다른 밭을 털쳐버리고 홀로 선다면, 거기다 행운이 따라준다면 공전의 히트를 칠 수 있다. 현재 1헥타르당 거래가가 수십억을 호가하며 바롤로란 후광 없이 밭 이름만으로 거래되는 MGA들은 이런 암흑기를 지난 후 따먹는 달콤한 열매다. 그래서 밭의 잠재력이 발현되기를 기다리는 밭이라 해서 빙산 MGA라 한다.

앞으로 돌아가 다니엘레 형제가 발견한 빙산 MGA는 바롤로 코무네의 베르제이사(Bergeisa)와 노벨로 코무네에 자리 잡은 베르제라-페쫄레( Bergera-Pezzole), 코리니-팔라렛타(Corini-Pallaretta)다.
베르제이사는 칸누비, 체레퀴오, 사르마싸를 병풍처럼 두른 밭이다. 1998년 이전에는 밭 소유주가 단 한 군데였고 클래식 바롤로에 사용되고 있었다. 석회석, 모래, 점토가 두텁게 층을 이룬 산타가타 이회토에 해발 280미터의 남동향 경사면 같은 자연조건이 주변 언덕과 일치한다.
그래도 베르제이사는 바롤로 코무네에 속해 홍보가 비교적 쉬웠으나 노벨로의 밭은 이러한 반사이익조차 없었다. 바롤로에서 멀기도 했고 인접한 알프스 기후 영향권에 속해 네비올로 재배에 부적당하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해 형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노벨로 밭 소유자의 대부분은 농사지은 포도를 납품하는 농부들이다. 30년 전만 해도 바르베라와 돌체토 와인의 수요가 많았고 네비올로는 구색을 맞추는 정도였다. 그러나 1990년대 라베라 밭에서 나온 바롤로가 와인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얻자 십 여 군데 포도농가가 와인생산자로 전향했다. 라베라 밭의 인기몰이는 노벨로 내 네비올로 식재면적을 총 532헥타르의 84%인 236헥타르로 끌어올렸고 이 중 193헥타르에서 바롤로 네비올로가 재배되고 있다”.
형제가 구입한 베르제라-페졸레 밭 전체 면적은 48헥타르나 클래식 바롤로나 밭 이름 반쪽만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이어 매입한 코리니-팔라렛타 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토질이 일정치 않고 경사가 가파르고 고도가 4백 미터가 넘는 언덕들이 서로 인접하고 있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총 105헥타르 중 능선이 완만하고 남동, 동향에 있는 31% (40헥타르)만 활용되고 있었다.
이미 관록이 있는 와이너리도 밭을 인수하자마자 MGA를 내세우지 않는 게 관행이다. 타인이 친구가 되기까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듯 밭주인과 포도밭도 서로 친숙해지고 알아가는 탐색기가 있기 마련이다. 60년 간 바롤로를 만든 루이지 에이나우디 와이너리 오너도 밭에 확신이 들고 주변의 평가를 들어 본 후 MGA 출시를 결정했을 정도다. 마찬가지로 형제도 토양의 가치를 발현시키기 위해 여러 클론을 시도해 보고 오크통 크기와 참나무 원산지를 바꿔가며 조건들이 일치하는 최접점을 찾아냈다. 비로소 2003년에 베르제라-페졸레, 2011년 코리니-팔라렛타 MGA 라벨이 등장했다.
바롤로가 유일한 산지인 나스체타 품종

다니엘레 형제의 안 가본 길에 대한 호기심은 품종 박물관에 표본으로 나 남았을 나스체타 품종 덕질로 이어졌다. 나스체타 품종은 바롤로가 원산지인 토착 화이트다. 형제가 나스체타 와인을 처음 맛본 1990년대는 서식지가 밭 가장자리나 자투리 땅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형제는 고문서 검색을 통해 원산지가 노벨로며 한 때는 농가마다 나스체타를 가꾸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건강한 포도나무를 선별하여 번식한 포도로 나스체타 8백 병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스체타는 주정부가 지정하는 재배 허용품종에 등록되지 못해서 테이블 와인으로 밖에 유통될 수 없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그들과 같은 문제에 직면한 엘비오 꼬뇨와 그의 사위 발토 피쏘레를 알게 됐다. 이들은 함께 등록에 필요한 유전자 분석과 토착품종 입증, 상업화 적합 판정을 거쳐 2001년 피에몬테주 재배 승인을 얻었다. 이어 랑게 비앙코 DOC등급을 받았으나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 등급의 생산지역이 광범위하고 다른 품종의 혼합을 허용하는 등 규정이 느슨했다. 이는 품종과 원산지를 결합하려는 시도로 연결됐다. 동참하는 생산자도 2명에서 15명으로 늘어났고 면적도 110헥타르로 증가했다. 2010년 세부지역(서브 존sub zone)으로 지정되어 랑게 나스체타 코무네 델 노벨로(Langhe Nascetta del Comune di Novello, Langhe Nas-cëtta del comune di Novello )란 이름의 Doc로 승급된다. 생산 지역 범위가 노벨로 코무네 내 13군데 마을로 좁혀졌고 타 품종의 혼합을 허용치 않고 숙성기간도 최소 5개월로 묶어두어 수확한 해 이듬해 4월 20일 이전에는 시판할 수 없게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형제는 PASINOT프로젝트를 출범시킨다. 파시놋은 노벨로와 접경한 1헥타르의 밭으로 토양과 기후가 바롤로 자연에 근접한다. 수령이 오래된 나스체타 750그루를 선발한 일종의 빈야드 콜랙션으로 최고령은 80살이다. 세 군 데 밭에서 마살레 선별(병균에 오염되지 않은 건강하고 우수한 품종을 가려냄) 한 29개 묘목을 번식시켜 얻어냈다. 파시놋은 크뤼 라벨로 본연의 풍미를 살리기 위해 13개월의 효모앙금 숙성과 7개월 병숙성을 해 완성했다.
랑게 나스체타 델 코무네 디 노벨로 파시놋 2022 Langhe Nas-cëtta del comune di Novello Pasinot - 청사과, 아카시아, 샐비어, 레몬과 자몽 같은 상큼한 시토론이 매혹적이다. 달콤한 살구, 자두 향도 내 비친다. 나스체타는 산미가 높지 않아 샤르도네 정도의 시큼한 맛이 난다. 하지만 미네랄 맛이 강해 우리의 미각은 산도가 높다고 인식한다. 미네랄이 받쳐주기 때문에 산미의 여운이 길고 과일 캐릭터가 도드라진다.
바르베라 달바 수페리오레 퍼르솔레 2022 Barbera d’Alba Superiore Persole - 스파이시, 원두 커피, 바이올렛, 흑자두, 말린 꽃다발, 사워체리의 쏴 한 느낌이 감돈다. 산미와 미네랄이 어우러져 놀라운 음용성을 보여준다. 12개월 오크 숙성으로 다듬어진 탄탄한 구조와 매끈한 결이 돋보인다.
네비올로 달바 파시놋 2021 Nebbiolo d’Alba PASINOT - 프로젝트 밭인 파시놋에서 자란 네비올로를 26일 침용해 바리크 1년, 보테 1년을 숙성했다. 파시놋은 중앙에 심은 나스체타 밭을 네비올로 밭이 빙 둘러싸고 있다. 바이올렛, 체리, 장미, 초콜릿, 수풀내음, 발삼, 민트 같은 네비올로의 순수함이 느껴진다. 순수한 향기 스펙트럼에 비해 타닌의 조밀한 짜임새와 산미의 조화로운 맛은 토양의 특성을 나타낸다.
다니엘레 형제는 바롤로 숙성의 묘미는 오크통 크기와 사용 횟수에서 결정된다고 믿는다. 오크숙성 첫 해는 바리크의 장점에 집중한다. 일단 크기를 225리터, 300리터, 500리터로 선별한 뒤 두 번 이상 사용한 오크를 추려낸다. 표면에 퍼져있는 기공을 통해 흡수한 산소가 색소분자와 타닌의 결합을 촉진시켜 오랫동안 붉은색을 유지할 수 있다. 산화에 취약한 네비올로를 미리 산소와 접촉시키면 쉽게 산화되지 않는다. 또한 산소와 접촉한 타닌은 제자리를 잡게 되어 식감이 빠르게 유연해지는 효과도 있다. 이어 보테 숙성을 2년 유지하여 우아함과 복합미를 얻게 되고 향기분자가 필 수 있게 도와준다.

바롤로 Doc 베르제이사 2019 Barolo Doc 2019 Bergeisa – 짙고 투명한 붉은색이 돌며 장미, 체리, 유칼립투스,라즈베리 등 정갈한 풍미와 잔향에 기품이 돈다. 밸런스 잡힌 산도, 순한 타닌이 어우러진 세련미가 출중하다. 온화함과 은은한 기품을 잘 녹아든 클라식한 느낌의 바롤로다.
바롤로 Docg 코리노-팔라렛타 2019 Barolo Docg Corino-Pallaretta - 블러드 오렌지, 가죽, 체리, 말린 라벤더 꽃다발, 흑자두 향이 감미롭다. 신선하고 정제된 산미, 전체적인 느낌이 섬세하여 만든 이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질 정도다. 향기는 한 번에 발산하기보다는 주저하는 듯하면서 긴 여운을 남긴다. 목 언저리부터 올라오며 미각을 전율하게 만드는 타닌, 산미는 미각을 스치면서 여운에 촉촉한 느낌을 남긴다.
바롤로 Docg 베르제라-페쫄로 2019 Barolo Docg Bergera-Pezzolo 2019 - 2019년의 덥고 건조한 여름이 강렬함과 힘으로 표현되는 다니엘레 형제의 아이콘 바롤로다. 허브, 블랙베리, 라즈베리, 농밀한 체리, 정향, 감초의 스파이시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목주변의 미각세포를 자극하는 탄닌, 강렬한 밀도감이 팽팽하게 신경을 붙잡는다.
바롤로 Docg 베르제라-페쫄로 리제르바 2017 Barolo Docg Bergera-Pezzolo 2017 - 바리크 3년 숙성, 병숙성 4년을 보낸 리제르바의 응집된 힘이 온 신경을 붙들어 매는 듯한 신비함을 만끽할 수 있다. 스파이시, 체리, 흑자두, 견과류, 블러드 오렌지, 에스프레소, 타바코가 매혹적이다. 거친 느낌의 타닌 그러면서도 유연한 풍모가 마치 해발 5백 미터의 몬포르테 달바 서늘함과 세라룬가 달바 레퀴오 토양의 특징을 함축해 놓은 듯하다.
바롤로 Docg 베르제라-페쫄로 리제르바 2015 Barolo Docg Bergera-Pezzolo – 10년 된 빈티지의 숙성미도 내비치지만 풋풋한 네비올로의 개성도 살아있다. 거기다 2015년의 우수한 작황이 내는 아우라까지 겸비한 와인이다. 너트맥, 타르, 오크향, 카카오, 가죽, 블러드 오렌지, 말린 꽃다발, 흑자두등 농익은 과일이 감각을 붙들어 놓는다. 경쾌하며 밸런스 잡힌 산미, 강인하며 기품 있는 바디, 조밀한 구조가 엮어가는 탄탄한 구성력을 즐길 수 있다.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공인 소믈리에
국제 와인 품평회 심사원
이탈리아 와이너리 투어 운영
이탈리아 치즈 테이스터 협회(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1 레벨 와인 치즈 테이스터
랑게 와인 앰버서더
로에로 와인 저널리스트 협회가 주최하는 2022년 국제 와인 저널리스트에 선정
Certified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Columnist of Korean Wine Magazines
Wine Judge from International Wine Awards
Awarded as Best Foreign Journalist for Roero Wine RegionLanghe Wines AmbassadorOrganizer of Winery Tour in Main Italian Wine Region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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