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차노와 외손주. 왼쪽- 알레시아, 오른쪽- 스테파노
루차노와 외손주. 왼쪽- 알레시아, 오른쪽- 스테파노

2023년 1월 5일, 바롤로의 거목 루차노 산드로네 Luciano Sandrone가 별세했다. 고인의 나이 76세였고 생애 50번째 포도수확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바롤로 업계에서는 한 생산자가 거둔 수확 횟수가 경력의 상징으로 통용된다. 루차노의 타계소식을 발표한 현지 언론들은 ‘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고인은 생전의 인품을 지켜냈다 ’고 전하면서 ‘겸손하고 배려심 있는 분이라 유족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식구가 다모인 연말 휴가기간을 자신의 사망일로 정한 거다’라 전했다.

루차노 산드로네는 수확의 나이테만큼 화려한 수식어가 따른다. 대표적인 예는 입지전적 인물, 가라지스트, 바롤로 보이스, 현대 주의자를 손꼽을 수 있겠다. 고인은 바롤로의 품질과 지역 내에 전수되던 전통 양조기법이 국제적으로 검증받는 초반기에 와인에 입문했고 시대 흐름의 맥락을 꿰뚫어 볼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독자적으로 세운 품질 기준을 자기검열하면서 자신만의 바롤로 기풍을 치열하게 갈고닦았다.

입지전적 인물에 관하여

루차노는 1946년 2월 목수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신배경은 와인과 직접 관련이 없었고 정식 와인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다만 고향인 바롤로에 막대한 포도밭을 소유한 팔렛티 후작의 여름별장인 바롤로 성을 지척에 두고 있었다. 빈약한 와인배경은 풍부한 현장경험이 대신했다. 선친은 본업인 목수 외에도 오크통 제작에도 유능해 와인 생산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어린 루차노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본의 아니게 와인세계와 연줄이 닿았다.

초중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이 농업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고 졸업 후 자코모 보르고뇨 와이너리에 취직했다. 양조부서에 들어갔으나 당시는 업무분담이 명확지 않은 시절이라 밭일부터 배달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와인과 관련된 일이 적성이 맞았고 마르케시 디 바롤로 와이너리로 이직해 원하던 양조장 책임자에 오른다. 보수가 적었는지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나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 부르건디를 찾았다. 와인 선진국의 신기술을 한 수 배우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부르건디 지역의 단일 품종 재배, 소농 위주의 향토성 짙은 와인에 집중하는 구조가 바롤로 지역과 흡사했고 이 모델을 밴치마킹하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가라지스트에 대하여

1977년 목수의 장남, 루차노에게 자신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1999년 완성된 본사 건물과 마주 보는 아늑한 산자락에 들어앉은 1.5헥타르의 칸누비 보스키스 Cannubi Boschis밭을 구입했다. 현재 이 밭은 헥타르 당 거래가가 수십억 원에 호가하지만 당시는 거저나 마찬가지였다. 수확한 네비올로를 양조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부모님의 차고를 빌렸다. 이렇게 탄생한 생애 첫 와인은 1천5백 병정도. 1981년 이 와인을 들고 빈이탈리 Vinitaly 와인 박람회에 참가했다.

이 박람회가 맨 손의 신참 양조가를 바롤로 최초의 가라지스트*로 등극시키는 변곡점이 될 줄이야. 이탈리아 국적의 미국에서 네고시앙으로 활동하는 마르코 데 그라지아가 그의 부스를 방문했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고 바롤로를 시음한 네고시앙은 루차노의 천재성을 직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와인 재고가 몇 병이죠. 다 나한테 팔 수 있어요’를 제안했을 정도다. 산드로네의 바롤로는 완판은 물론 미국평론가들이 그를 가라지스트로 칭할 정도로 큰 반향을 이끌어 냈다. 로버트 파커는 1978 빈티지에 97점 , 이어 1990년 빈티지는 100점을 수여했다.

*가라지스트- 차고에서 고품질 와인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와인메이커를 지칭한다. 이들은 무명에 자본금 부족의 단점을 고품질 소량 생산전략으로 돌파하려 했다.

현대주의자와 바롤로 보이스에 대하여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바롤로 전통 생산 방식에 반기를 든 젊은 생산자 일군을 바롤로 보이스라 한다. 이들은 프랑스산 유명 와인에 비해 저가에 책정돼있는 바롤로의 밸류를 끌어올리려면 프랑스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도입한 품질개선안 중에는 바리크(225리터) 숙성이나 면적 당 소출량을 대폭 감소 같은 농법을 들 수 있다. 바롤로 보이스의 열풍은 바롤로 품질의 전반적 상승과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바롤로 보이스가 활용했던 첨단 농법이나 양조법을 현대방식이라 하며 이 방식을 추종한 생산자를 현대주의자라 한다. 바롤로 보이스의 시초는 라모라 마을의 엘리오 알타레가 부친이 사용하던 보테를 전기톱으로 두 동강 낸 날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어 엘리오 알타레가 밀라노에 거주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구입한 바리크에 바롤로를 숙성했고 이를 1983년 출시했다.

루차노는 바롤로 보이스 멤버였으나 엘리오 알타레에 앞서 독자적으로 선진 기술을 구사했다. 단위면적 당 소출량을 대폭 낮추었고 짧은 침용과 바리크 숙성을 통해 풍부한 과일향과 매끈한 타닌을 실현했다. 바리크를 선호한 이유는 전통 용기인 보테의 단점을 간파한데 있었다. 견고하며 오래 사용할 수 있으나 원활한 숙성력을 확보하려면 침전물이 기공에 침착되어 기공이 막히는 일이 없도록 자주 세척 해야 하는 맹점이 있다. 이런 점으로 봤을 때 루차노를 어떠한 트렌드나 분류로 수식하는 건 적당치 않다고 생각되며 다음의 내용에서 좀 더 확실해진다.

현대와 전통을 포옹하는 중도적 기풍

산드로네를 어떠한 범주에 묶을 수 없는 데는 고인의 외동딸이자 공동 오너인 바르바라의 의도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바르바라는 ‘아버지는 톤노를 선호했어요. 톤노(tonneaux, 5백 리터, 한 통의 숙성 용량은 667병 정도)는 보테보다 작고 바리크보다는 큽니다’라며 ‘아버지는 전통과 현대를 절충한 톤노가 바롤로 숙성에 적합하다고 확신했어요”라고 밝혔다. 바롤로 스타일을 좌우하는 기준을 오크통 크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산드로네는 중도주의자다. 프랑스산 참나무를 조립해서 만든 톤노를 최대 세 번까지 사용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숙성하는 돌체토 달바만 제외하고 바르베라 달바와 4종의 네비올로는 1년의 톤노 숙성이 기본이다.

또한 돌체토, 바르베라, 네비올로등 토착레드품종만 고집한다는 점에서 전통색이 강하다. 2013년 루차노가 카누비 보스키스의 이름을 알레스테(ALESTE)로 바꾸기로 한 결정도 전통적인 성향을 반영한다. 알레스테는 손녀인 알레시아와 손주인 스테파노의 첫 자모음을 결합한 것이다. 170개 MGA(크뤼) 중 정상을 구가하는 밭을 포기하기로 한 결정은 대세 따윈 개념치 않겠다는 의지다. 루차노한테는 무명의 그를 일약 스타로 빛나게 한 바롤로보다 산드로네의 미래인 후손은 무한대의 가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산드로네 아로마의 비밀병기

10월 초 필자가 산드로네 경내로 들어서자 시큼한 발효향이 코를 덮쳤다. 실내는 모터작동음으로 소란스러웠고 실내온도도 후덥지근했다. 후에 와인을 시음하면서 알게 됐지만 나를 매혹시킨 아로마의 정체가 바로 이 어수선함에 있었다. 일명 저온 전침용(PRE-FERMENTATION)으로 불리는 기법은 고급 화이트 와인 발효에 일반적인 테크다. 발효 전에 압착한 포도즙을 저온 상태로 몇 시간 놔두어 아삭한 느낌과 풍부한 아로마 추출을 노린다. 산드로네의 상온 전침용(PRE-FERMENTATION)은 향기 분자구조가 다른 레드 품종에 특화된 기술로 30도 이상 예열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단시간 내에 원하는 과일 아로마를 얻는데 목적이 있다.

이어 뚜껑이 열린 발효조에 예열한 포도즙이 채워지면 알코올 발효가 개시되는데 이때 상부에 장착된 샤워 헤드가 작동된다. 샤워 헤드와 연결된 파이프를 타고 상승한 즙이 주기적으로 위에 뜬 고형물을 적신다. 마치 포도껍질이 샤워하는 모양새다. 기존 침용법이 고형물을 회전시키면서 원하는 성분을 추출하는 데 반해 고형물 층을 건드리지 않고 계속 즙으로 적시는 게 핵심이며 향기분자 파괴의 최소화를 노릴 수 있다.

돌체토 달바 2023- 산딸기, 발효향, 바이올렛, 자두의 상큼한 향은 유쾌함을 준다. 돌체토 본연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 솔직한 와인이다. 순한 타닌과 산미가 어우러진 깔끔한 맛이 살아있다.

바르베라 달바 2022- 역대 가뭄과 더위를 겪었던 포도란 선입관을 깨트리는 바르베라다. 톤노 사용 횟수와 블랜딩 비율을 세심히 조절해 우아함과 식감의 균형을 얻었다. 성분이 이질적인 토양이 어우러진 화사한 향기, 바디, 산미 바구니가 내 품에 안긴 듯 행복감에 젖게 만든다. 바르베라는 구조감이 떨어지는 품종인데 포도송이 발효에서 얻은 타닌을 소량 섞어 바디를 보완했다. 스파이시, 블랙베리, 라즈베리, 라벤더의 풍부한 과즙향과 싱그런 산미를 입안 가득 전한다.

네비올로 달바 발마조레 2022- 바롤로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로에로 토양의 기반인 모레의 미네랄과 섬세한 향취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톤노로 2년 숙성한게 믿기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여리다. 장미, 말린 토마토, 체리, 유칼립투스, 장미, 바이올렛향이 은은하게 번진다. 혀에 와닿는 타닌의 유연함과 상큼한 산미가 어우러진 사랑스러운 네비올로다.

바롤로 레 비녜 2020- 노벨로의 메를리밭, 바롤로의 비냐네 밭, 카스틸리오네 팔레토의 빌레로 밭, 세라룬가 달바의 바우다나 밭, 몬포르테 달바의 레 코스테 디 몬포르테 밭을 분리 수확해서 제 각각의 톤노에서 2년 숙성했다. 병입 직전에 블랜딩 해 2년 더 숙성했다. 체리, 장미, 낙엽, 라벤더, 체리, 정향, 감미로운 스파이스, 흑연이 감미롭다. 매끄러운 타닌 질감, 조밀한 밀도, 밸런스로 무장한 바롤로의 매력을 발산한다. 2020년 빈티지는 빠른 숙성력이 낳은 음용감이 특징인데 보통 2년 더 숙성한 와인이 지닌 완성도를 보여준다.

바롤로 알레스테 2020 - 2013년에 바뀐 칸누비 보스키스의 새 이름으로 품종, 숙성방법은 그대로 유지했다. 밭의 본질인 토르토니아노의 모래와 레퀴오의 석회석과 점토의 이점을 살린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알레스테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내 대답은 간단하다. 바롤로에 빠져들게 만드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유칼립투스, 바이올렛, 장미, 블러드 오렌지, 숲 향기, 라즈베리, 말린 꽃다발, 농익은 딸기즙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여기에 기품이 도는 잔향까지 더해져 신비롭기까지 하다. 조각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 빈틈없는 타닌이 주는 꼭 끼는 입맛, 목에 넘어가는 순간까지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는다.

아픈 네비올로가 바롤로로 승화

완전하고 흠 없는 완성체만 주목받는 시대에 루차노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것에도 집착했다. 평생 축으로 삼았던 완벽주의와 충돌하지만 부족한 것에서 가능성을 찾던 고인의 낙천적 기질을 보여준다.

2019년에 데뷔한 비테 탈린(Vite Talin) 바롤로는 33년 만에 세상빛을 보게 된 고인의 역작이다. 비테(Vite)는 품종의 이탈리아어고 탈린(Talin)은 나탈레의 별명이다. 1987년, 루차노는 탈린이 소유한 레코스테 밭을 임대했다. 이 밭에서 열리는 포도는 색달랐는데 과피색이 흑색에 가까운 청색이 돌고 송이가 작고 알이 듬성듬성 열렸으며 과분층이 두꺼웠다. 네비올로인 것 같기도 했지만 형색이 병든 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와인 맛은 괜찮았다. 그는 토리노 대학교의 포도품종학의 일인자인 안나 슈나이더 박사에게 유전자 분석을 의뢰했다. 검사결과는 미켓(네비올로 클론)의 일종이며 병균에 감염된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당시 유전자 분석 기술은 정밀도가 낮아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루차노는 씨눈을 대목에 접목시켜 얻은 50그루의 묘목을 번식시켜 5백 그루를 얻었다. 치료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포도가 제 맛을 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병든 나무는 의외로 노균병과 보트리티스균에 저항력이 뛰어났고 작황과 무관하게 품질이 꾸준했다.

비정상 품종의 가능성에 확신이 선 루차노는 원래 있던 밭에다 옮겨 심었다. 한편으로는 포도 상태에 적합한 숙성 및 발효법을 찾기 위한 실험도 병행했다. 실험을 거듭한 끝에 2013년 첫 와인을 생산했다.

2017년은 33년 동안 품고 있던 의구심이 풀리는 해다. 30년 전 유전자 검사를 했던 안나 슈나이더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확도가 개선된 첨단 DNA 분석장비를 사용해 재 검사했더니 네비올로 클론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이었다. 2013년 와인을 생산해 놓고 어떤 등급으로 등록해야 할지 난감하던 터에 날아든 낭보였다. 2017년에 병입 하여 2019년에 바롤로 등급심사에 통과해 바롤로로 출시했다.

필자는 여섯 번째 빈티지인 2018년 산을 시음했다. 리제르바로 표시하지 않았지만 거의 리제르바 수준의 정성과 시간이 투여됐다. 주문 제작한 50 헥터리터 티니 오크통에서 35일간 발효와 침출을 거친 뒤 톤노에서 젖산 발효를 마쳤다. 이어 톤노 2년, 보테 1년, 병입 3년 등 도합 6년의 숙성기간을 보냈다.

이 와인 앞에서는 전혀 모르는 와인을 마주할 때처럼 열린 마음이 요구된다. 임팩트가 강해 산드로네 기풍에서 멀어진 느낌이다. 집중미가 뛰어나고 빈틈없이 채워진 타닌이 표현하는 긴장감이 전해진다. 민트, 감초, 캐러멜, 블랙베리, 카카오의 강렬함에 스파이시함이 여운을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야성의 자연이 꿈틀거리며 어떤 달인이라도 어떤 장비라도 다스릴 수 없는 완강함이 버티고 있다. 연 생산량 2천 병 정도

산드로네 건물 안뜰 한 켠에는 고인의 손녀인 알레시아의 작은 실험실이 마련돼있다. 아픈 품종을 치료해 건강을 되찾은 정상 네비올로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치유된 네비올로가 낼 풍미가 궁금하던 손녀가 벌인 일이다. 대물림하는 호기심 유전자도 놀랍지만 그녀가 네비올로 경계를 초월해 우리 앞에 펼쳐 보일 네비올로의 색다른 맛이 기대된다.

알레시아의 실험실- 이미지 하단에 있는 나무가 건강을 되찾은 네비올로
알레시아의 실험실- 이미지 하단에 있는 나무가 건강을 되찾은 네비올로

 


백난영
이탈리아 소믈리에 협회(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공인 소믈리에
국제 와인 품평회 심사원
이탈리아 와이너리 투어 운영
이탈리아 치즈 테이스터 협회(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1 레벨 와인 치즈 테이스터
랑게 와인 앰버서더
로에로 와인 저널리스트 협회가 주최하는 2022년 국제 와인 저널리스트에 선정

Certified Sommelier by Associazione Italiana Sommelier
Columnist of Korean Wine Magazines
Wine Judge from International Wine Awards
Awarded as Best Foreign Journalist for Roero Wine RegionLanghe Wines AmbassadorOrganizer of Winery Tour in Main Italian Wine RegionFirst Level Certified Cheese Taster by Organizzazione Nazionale Assaggiatori Forma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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