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영국 출신 와인 상인들 사이에서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한 가지 있다. ‘’(와인을 고르고) 살 때에는 빵이랑 사고 (와인을) 팔 때에는 치즈와 함께 팔라.’’ 이 이야기는 다양한 버전이 있는데 빵이 들어갈 자리에 종종 사과가 들어가기도 하고 심지어 당근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 인고하면, 와인을 구입하기 위한 시음을 할 때 사과나 당근 이랑 먹어도 맛이 좋았다면, 그 와인은 꽤 괜찮다는 의미다. 사과나 당근이 좀 심했는지, 오늘날의 현명한 시음자들은 주로 물을 이용한다. 와인을 맛본 후 입안을 깨끗이 헹궈 주어, 다음 시음을 위한 객관적인 판단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물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피로하고 배고픈 시음자들을 위해 물병 옆의 작은 바구니에 빵이나 비스킷이 담겨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시음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고 이전 시음으로 얼얼해진 입안을 달래준다.

반면에 치즈는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와인을 구입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시음을 하며 치즈를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직업의식이 결여되어 있을뿐더러 머지않아 그의 사업은 망할지도 모른다. 치즈가 와인의 맛을 더 좋게 만들어 그 위장된 맛에 속아 영 별 볼일 없는 와인을 사들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치즈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극찬이 있을까 싶다. 마치 100% 흥행을 보장하는 귀하신 조연 배우 같다고나 할까. 

평범한 와인을 돋보이게 한다는 그 치즈가 추억처럼 간절히 생각날 때가 있다. 프랑스에서도 (질 좋은) 치즈가 그다지 싸다고 느끼지는 못했지만, 몇 만 원의 재료 값을 들여 한국 음식을 해 먹느니 이왕 현지에 온 거, 그 보다는 저렴한 치즈를 다양하게 먹어보자 하던 때가 있었다. 주로 와인과 함께, 가끔은 요리로, 그것도 아니면 그저 간식으로 요것 저것 사 먹던 치즈가, 가랑비에 옷 젖듯 이제는 각인된 맛으로 떠오른다.

특유의 향과 퍽퍽한 신맛으로 독보적인 개성을 뽐내는 염소 치즈, 달콤한 과일, 견과류 맛으로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것 같은, 이름마저 귀여운 오렌지색 미몰레뜨(Mimolette), 프랑스의 진짜배기(?) 까망베르의 암모니아 향에 놀란 내게, 순화된 부드러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브리야 사바랑(Brillat-Savarin), 그저 샐러드 위에 대충 얹어만 놔도 비할 데 없는 특별한 감칠맛을 주는 로크포르(Roquefort), 그리고 쫄깃한 고소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콩테(Comté)까지…

치즈를 먹고 있으면 꽤나 사치를 부리고 있는 느낌이다. 보수적이고 협소했던 내 입맛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나라는 인간의 세계관이 더욱 확장되고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이다. ‘치즈 없는 디저트는 한 쪽 눈이 없는 미인 과도 같다’는 섬뜩한 말을 남긴 미식의 대가, 브리야 사바랑(Jean Anthelme Brillat-Savarin)이 들으면 아주 기특하다고 하겠지만, 또 다른 이가 들으면 남의 나라 음식 먹으며 그 무슨 문화 사대주의 같은 소리냐 할 수도 있겠다. 익숙한 것만을 좋아하는 내게, 그만큼 치즈는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질감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스스로 대견한 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도 한국의 구수한 전통 청국장에 밥 한 공기를 후딱 비워내며 나와 같은 감동을 느끼고 있을 외국인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반드시 치즈와 함께 팔아야 성공한다는 와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와인과 치즈는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 오랜 세월에 걸쳐 농가의 식탁에 늘 함께 올라 서로의 맛과 향을 보완하며 발전해 왔다. 특정 지역의 치즈는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고유의 제조 방식과 특유의 맛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와인과 같다. 무엇보다 치즈와 와인은 발효 과정을 거친 자연식품으로서, 살아있는 식품이라는 사실이다.

치즈가 와인의 맛을 그렇게 좋게 만든다니, 마침 집에 고이 모셔둔 레드 와인도 한 병 있겠다, 뛰쳐나가 근처 백화점의 치즈 코너에서 뭔지는 모르지만 파격 할인 중인 치즈를 하나사 오면 이제 준비는 끝난 것일까? 또 시작이다 싶겠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음식 궁합의 문제가 발생한다. 프랑스만 해도 300종이 넘는 치즈가 존재하고 그 개성 또한 달라서 그보다 더 많은 와인과의 적절한 조합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한 테이블에 여러 스타일의 와인을 두루 갖추고 있는 운 좋은 식사가 아닌 이상, 너무 각기 다른 종류로 가득한 치즈 보드를 내 오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다. 두툼하게 구운 스테이크에 가벼운 화이트를 곁들이는 것과 같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할 경험을 피하려면 역시 조금의 요령은 필요하다. 한편 이때의 치즈란, 크림 등 각종 첨가물이 섞인 가공 치즈가 아닌, 원유와 원유를 응고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성분만을 원료로 하는 자연 치즈에 한한다.

레드보다는 화이트

뒤카스(Ducasse)와 기 사부아(Guy Savoy) 등에서 오랜 기간 일 한 에마뉘엘 델마스(Emmanuel Delmas)라는 소믈리에는 이에 대해 확고하다. 치즈에 레드 와인이 있을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레드 와인의 타닌은 치즈의 기름진 맛과 유산균, 치즈 특유의 외피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옛날, 유럽의 농가에서 포도찌꺼기에 물을 타 타닌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알코올 도수도 낮으며 멀겋기만 했던 와인 즉 피케트(Piquette)를 마시던 시절에나 있던 습관일 뿐이라고 한다. 실제로 타닌은 우유 맛과 만나면 쓴맛이 느껴져, 치즈에는 화이트 와인이 좋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이트 와인의 높은 산도는 치즈의 짠맛을 중화 시키고 와인의 과일 향은 더욱 살아난다.

레드가 어울리는 예외

체다(Cheddar)나 에멘탈(Emmental) 혹은 콩테(Comté)처럼 감칠맛이 나거나 고소한 타입의 단단한 치즈는 타닌이 적당히 있는 레드 와인이 잘 어울린다. 보르도 메독(Médoc) 지방의 타닌이 강한 카베르네 소비뇽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한편, 카망베르(Camembert)나 브리(Brie) 등 질감이 부드럽고 겉이 흰 곰팡이로 덮여 있는 치즈에는 맛의 여운이 길고 무게감 있는 화이트 와인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타닌이 강하지 않은 가벼운 레드 혹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미디엄 바디의 레드 와인도 적절히 어울린다. 예를 들어 보졸레(Beaujolais)나 메를로(Merlot)의 산뜻한 과일 향과 치즈의 섬세한 버터 맛의 조화가 색다른 경험이 되어 줄 것이다.

▲ 그 자체로도 좋지만 함께 하면 더 좋은 것이 치즈와 와인이다. <그림=송정하>

신선한 맛의 조합

치즈와 와인의 페어링도 일반 음식의 그것과 같다. 각각의 밸런스를 고려해 서로가 지닌 맛과 향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모짜렐라(Mozzarella)나 리코타(Ricotta) 등 수분이 많고 순한 맛의 신선 치즈 그리고 독특한 향과 신맛의 염소 치즈를, 산도가 높고 상큼한 과일 향이 풍부한 가벼운 스타일의 화이트 와인과 먹으면, 입안에서 치즈의 신선함과 신맛이 그대로 살아나 잘 어울린다. 프랑스 루아르(Loire)나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 등이 좋은 예다.

강한 맛의 조합

한편 특유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먹기에 망설여지는 치즈들이 있다. 오렌지 색 껍질이 예뻐 다가가 만지면 그 습기 가득한 끈적함 과 마치 축사 에라도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고약한 암모니아 향을 뿜어내는데 뮌스터(Munster)나 에푸아스(Epoisses) 같은 치즈가 이에 속한다. 치즈 표면을 소금물 등으로 씻어서 숙성을 시켰기 때문에 워시 타입(Washed rind type) 치즈라고 부른다. 이런 부류의 치즈들은 강한 향에 맞설 무게감 있고 풍부한 맛의 화이트 와인을 필요로 한다. 프랑스 알자스산 게뷔르츠트라미네(Gewürztraminer) 품종의 와인이나 깊고 오묘한 맛을 내는 부르고뉴산 샤르도네 등의 와인을 곁들이면 치즈의 강한 향 뒤에 숨어 있는, 버섯 향 가득한 부드러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입안에 상쾌함을 줄 달지 않은 샴페인 또한 좋은 선택이다.

독특한 향과 맛으로 블루치즈만 한 것이 없다고들 한다. 강하고 때로는 역할 정도로 톡 쏘는 향과 짠맛이 특징이지만 사실 청국장의 민족인 한국인으로서 이 정도는 견딜 만(?) 하다. 살짝 개봉한 채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냉장고 안이 온통 청국장 냄새로 진동한다. 사실 이 치즈는 냄새보다는 치즈 속 푸른 곰팡이의 비주얼이 더 충격이지만 영어권에서는 블루(Blue)라는 아름다운 색의 단어를 쓴다든지, 프랑스에서는 ‘파슬리를 뿌린 것 같은’(Persillé) 치즈라는 순화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흥미롭다. 프랑스의 로크포르(Roquefort), 이탈리아의 고르곤졸라(Gorgonzola) 그리고 영국의 스틸턴(Stilton) 같은 치즈들이 블루치즈에 속하는데, 단 맛이 강한 와인과 만나면 치즈의 짠맛이 중화된다. 포르투갈의 디저트 와인 포트(Port)나 프랑스의 그르나슈(Grenache) 품종으로 만든 뱅 두 나튀렐(VDN, Vin Doux Naturel) 그리고 단 맛과 신맛이 날카롭게 조화를 이루는 프랑스의 소테른(Sauternes) 지역 와인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인 미식이 될 것이다.

‘새로운 음식을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것보다 인간의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

이제는 치즈의 이름이 된, 브리야 사바랑의 수많은 미식에 관한 명언 중 하나인데 우주를 탐구하는 천문학자도 과연 이 말에 공감을 할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별을 발견할 수는 없을지 언정 새로운 맛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느끼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 문화에 다가가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의 틀을 벗어나 넓어진 시야만큼 더 커진 삶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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